‘이어도 사나 아 이어도 사나 힛/ 혼착 손엔 태왁을 메고 혼착 손엔 호밀 매영/ 한질 두질 열두질을 들어가니/ 고동 생곡 하건만은 나 이몸은 자신 없어 못허겠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가파도(加波島) 해녀들이 물질을 하며 부르던 ‘노 젓는 소리’다. 해녀들은 물질작업을 나갈 때 배를 저어가면서 이 민요를 불렀다. 지금 가파도에는 2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1946년에 설립된 가파초등학교에는 12명의 학생이 재학중이다. 가파교의 전신은 명호(鳴呼) 김성숙(金成淑) 선생이 1922년에 세운 신유의숙(辛酉義塾)이다. 김성숙은 일찍이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해방 후에도 진보진영에 몸담아 정치활동을 펼쳤으며, 4ㆍ19 이후 민의원에 당선되어 특히 4ㆍ3을 바로 정립하려고 애를 썼다.
모슬포항에서 5.5㎞ 거리에 위치한 가파도는 주민들이 주로 어업으로 생활한다. 조선영조 26년(1750년) 목사 정언유가 진상을 위하여 흑우(黑牛)를 방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조선헌종 8년(1842년) 목사 이원조가 흑우약탈을 막기 위하여 주민들의 입도를 허가하였다. 상모리 “고부이씨”, 하모리 “경주김씨”, “김해김씨”, “진주강씨”, “나주라씨”등 40여 가구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처음에는 “더우섬”, “개파도”로 칭하였다.
“독립을 희망하는 이유는?” 일본인 판사가 물었다. “학교제도가 불완전한 것, 그리고 한?일간에 민족적 차별이 있는 것과 지금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독립이 된다면 그런 문제가 해소되니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다.” 경성고보 학생 김성숙이 대답했다. “장래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다시 판사가 물었다. “독립의 호기가 오면 또 할 작정이다.” 김성숙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김성숙은 풀려났고, 꿈에 그리던 고향 가파도로 돌아왔다.
‘활발하고 건강한 우리 학도는/ 일조의 성광이 비치었으니/ 소리를 마주치고 용맹스럽게/아~~~ 찬송합시다// 위롭다 한라산을 쳐다보셔요/ 맹렬한 동풍한설 몇 번 지나도/ 만고불변 엄연하기 군장의 절개/ 아~~~ 고상하도다’ 김성숙이 지은 신유의숙 교가 전문이다. 김성숙은 고향에 돌아온 후 향리에 학교를 세우고 주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나갔다. 당시 공립보통학교 모표는 모두 벚꽃인데, 신유의숙 모표는 무궁화로 일경(日警)의 주목을 받았다. 김성숙은 다시 큰 뜻을 품고 도일(渡日), 와세다대학〔早滔田大學〕정치학과에 입학할 때까지 의숙을 부동의 토대위에 올려놓으려고, 훌륭한 선각자들을 교사로 초빙하였다.
해방이 되자 김성숙은 한국사회당 당수로 활약하면서,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의 특징은 보수정당과 혁신정당간의 대결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로 혁신세력의 부활하면서 활발한 정치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혁신세력은 보수온건정파인 민주당보다는 더욱 강력하게 4월 혁명의 완수를 주장하며, 선거과정에서 혁명의 계승권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선거를 치르는 동안 상대후보는 합동유세에서 “혁신당은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는 그 원조가 유물론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일 뿐만 아니라, 4ㆍ3 사건도 사회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다”고 주장해 유권자들을 자극하였다. 김성숙은 상대후보의 발언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상대후보를 검찰에 고소하였다. 결국 김성숙이 1만3114표의 최다득표로 당선, 전국적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1960년 김성숙이 국회에 제출한 ‘제주도 양민학살에 관한 건의안’은 5ㆍ16이 터짐으로써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지만, 국회에서 최초로 4ㆍ3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었다.
5ㆍ16 군사정변으로 김성숙의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성숙은 구속되고 그가 속한 혁신계 정당은 해체되었다. 1961년 12월 통일사회당 당원 13명과 함께 기소되었고, 1962년 2월 11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고 항소했으나, 4월 27일 혁명재판소 항소심에서는 이를 기각했다. 김성숙은 중앙통일사회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 판결문에 의하면 ‘..............8ㆍ15해방으로 귀국하여 서기 1945년 10월경 각 정당 행동통일위원 대표상무, 민족자주연맹 중앙조직부장등을 역임하였고 김규식(金奎植)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하고 월남 후 민주혁신당 부위원장, 한국사회당 총무위원 등을 역임 활약하다가 제5대 민의원에 입후보하여 당선되고 통일사회당을 발기하여 정치위원 겸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하여 활약하여 오던 자..............’라고 쓰고 있다. 세월이 지났지만 후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 커, 선거철이 가까워 독자들에게 던져보았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