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폐지 후의 족보(族譜)
호주제폐지 후의 족보(族譜)
  • 제주타임스
  • 승인 2004.0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회 청문회에서 ‘김영란’ 대법관은 호주제폐지를 찬성하면서 이 법안이 올해를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초대 여성부장관을 지낸 전 ‘한명숙’ 환경부장관은 85년에 낳은 아들 이름을 ‘박한길’로 지었다. 남편성인 ‘박’과 자신의 성인 ‘한’을 합성한 것이다.

이외에도 부모 양성을 나타낸 이름을 언론매체 등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이는 1977년 여성계 인사들이 중심이 된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의 결과다.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이 운동을 호주제 폐지를 위한 상징적인 운동으로 제안했다.

양성 평등을 위한 ‘양계혈통(root.re.kr)’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종주’씨는 어머니의 성도 따져보면 외할아버지 성이기 때문에 결국 부계성이긴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성을 빼고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버지 성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데 대한 반발로 이어져 호주제폐지가 가속화 될 수 있는 기대에 힘이 실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성은 조선 초기에 양민에게까지는 보편화되었으나 노비나 천민 계급은 조선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09년 새로운 민적법이 시행되어 국민 모두가 성과 본을 갖도록 법제화되면서 누구나 성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 때에 성이 없던 사람들에게 면(面)서기나 경찰이 성을 지어주기도 하고 머슴인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그대로 따르기도 했다. 그 바람에 성씨와 본관의 수가 늘어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 성씨의 수를 살펴보면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 21년에 ‘이의현’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고 문헌에 수록된 것을 모두 합한 것이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에는 258성, 1985년 인구센서스에서는 274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86성으로 불어났다. 우리나라 성씨의 수난기인 1939년에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시행된 ‘창씨개명’과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의 여파로도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성씨를 근간으로 하는 족보를 보존하고 전통과 윤리를 내세우며 호주제폐지를 극구 반대하는 유림의 논리로는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문이나 씨족의 전통윤리가 파괴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 이유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그 중하나가 족보문제다.

우리나라의 족보의 시초는 고려시대에 귀족과 양반사회에서 씨족의 계보를 기록으로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서 기인한다. 그 후 조선시대의 족보는 1476년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체계적으로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다. 다음으로 1565년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가 간행되면서 명문세족에서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했다.

족보는 가문의 전통과 역사를 증빙하는 유일한 기록으로 자리매김해 왔던 게 사실이다. 우리 조상들은 최소한 족보를 볼 줄 아는 자손이 탄생하길 기원했다. 그것이 곧 남아 선호사상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족보는 무한의 신성 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을 부정하는 측면도 만만치 않다. 어느 교수는 대다수의 족보는 가짜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16, 17세기까지 성이 없는 노예가 인구의 40%를 차지했고 족보와 인연이 없는 평민이 40~50%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를 펴는 학자도 있다.

나로부터 10대조까지만 올라가도 2의 10승은 1,024명이다. 곧 나에게 유전자를 전수시킬 수 있는 조상이 1,024명이나 된다는 말이다. 그 1024명의 조상 중 반수는 모계(母系)다. 그런대도 이 반수의 모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의 족보체계다. 철저한 부계(父系) 중심의 기록인 것이다. 나에게 유전자를 줄 수 있는 반수의 모계를 무시해버린 현존하는 족보의 모순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족보의 모순에 대하여 어느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의 한 교수가 자기의 증조모의 성은 알고 있는데 증조부의 성은 모른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이 우리나라 교수의 입에서 나왔다면 반응이 어떠했을까.

이제 사회 일각에서는 호주제 폐지를 기정사실로 받아드리고 있다. 부모의 양성을 합성한 새로운 성이 탄생은 이미 예고돼 있는 것이다. 호주제폐지 후의 족보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