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비움의 미학(美學)
[세평시평] 비움의 미학(美學)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1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락(凋落)의 가을 산은 적막하여 쓸쓸하다.

늙은 배우의 마지막 불꽃 연기(演技)처럼 온 산을 채색하던 단풍들마저 한 잎 두 잎 숲을 떠나 가뭇없이 사라져 가고, 열매 하나 남지 않은 불임(不妊)의 나무들에는 더 이상 산새들도 찾아 들지 않는다. 감추어졌던 산의 속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하얀 뼈들이 첩첩이 쌓여 켜를 이룬 것 같은 암벽들이 벽공(碧空) 아래 외롭고, 총총걸음으로 텅 빈 골짜기 사이를 건너가는 바람소리도 스산하다.

나무의 바다로 넘실대던 여름날의 눈부셨던 그 산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줄을 이어 산길을 오르내리며 땀을 훔치던 그 많던 사람들은 지금은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시간이란 이름의 풍화(風化) 속에 지난 여름 산의 기억이 첫사랑 연인처럼 아련해지며, 문득 허무의 그림자가 질펀한 낙엽처럼 발에 밟혀 온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더니, 흐르는 시간 속에 사람도 자연도 모두들 떠나는구나. 그래, 머지 않아 나도 자연과 사람들을 떠나 절대고독이라는 적멸(寂滅)의 무덤에 홀로 몸을 뉘어야 하겠지. 겨울에 대한 예감으로 더욱 쌀쌀한 가을 산의 적막을 응시하며 새삼 살아있는 것들의 덧없음에 전율한다.

그렇지만 가을 산행에서의 허무한 감상(感傷)은, 사실 사시(斜視)의 편벽(偏僻)이 잉태한 미망(迷忘)일 뿐이다.

그 동안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해 오며 살아 온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 때문에, 산에 와서도 껍데기만 볼 뿐, 정작 산이 품고 있는 비의(秘意)는 놓치고 마는 잘못된 독법(讀法) 때문인 것이다. ‘텅 빈 충만(充滿)’이라고 했던 이가, 법정(法頂) 스님이었던가.

오히려 가을 산은 바로 그 비움으로 더욱 충만하다. 스스로 비움으로써 만고청산(萬古靑山)의 역사를 연면히 이어 가고, 그윽한 산세를 키워가는 것이다. 매서운 겨울 바람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나목(裸木)이 되어 몸피를 줄이고, 노루 꼬리만한 겨울 햇살로는 광합성(光合成)이 불가하기에 스스로 낙하하여 훗날을 기약하는 자양(滋養)이 되는 것이다. 그 뿐인가.

넓은 가슴에 품고 보살피던 노루와 너구리, 족제비, 다람쥐, 개구리, 뱀, 그리고 산새들에게 제 각각 겨울을 날 둥지를 사람들 시선 닿지 못하는 곳에 마련해 떠나 보내고, 산 홀로 추위와 고독을 감내하는 것이다.

만일 가을 산의 속내가 이렇지 않다면, 새봄을 맞아 중환자처럼 파리했던 나목들마다에서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새싹들과 선명하게 더해진 나이테, 훤칠한 수고(樹高), 그리고 더욱 건강한 몸으로 이 곳 저곳에서 기지개를 켜며 나타나 산의 주인임을 증거하는 그 많은 생명체들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가을 산에서 더 이상 감상에만 젖어서는 안 된다.
대신 큰 도약을 위해 한껏 움추린 물가의 개구리처럼, 더 큰 내일을 위해 숨을 고르는 산의 침묵과 결의를 읽어내야 한다. 텅 빈 충만의 미학(美學)이 어디 가을 산에만 있는가.
사람 사는 세상도 비움이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

세상의 온갖 번뇌를 다비(茶毘)의 불길로 태워버리고 표표히 떠나가는 대덕고승(大德高僧)들이 남기는 가없는 지혜의 원광(圓光)은 차치(且置)하더라도, 자신을 비움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완성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행장(行狀)은 밤 새워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제 몸을 버리고 ‘사람의 길’을 갔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사람들. 이기(利己)를 버리고 이타행(利他行)을 통하여 ‘사람의 향기’로 남은 의로운 사람들. 비록 태어난 곳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그 비움의 격(格)이 다르다할지라도, 그들은 각자의 비움들을 통하여 우리 사회를 살아 볼만한 세상으로 튼실하게 키웠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움을 통하여 꽃보다 아름다운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가진 것이 많은 유명인사들도 있지만, 서민의 애환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도 적지 않다. 김밥가게 아주머니, 환경미화원 아저씨, 평생을 삯바느질로 보낸 할머니, 그리고 제 앞가림도 버거운 장애우들도 있다.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사회를 위해, 자신보다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자신을 비워 남을 살린 미담(美談)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훈훈한 감동으로 물결치게 한다.

그렇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을 ‘비우기’를 두려워한다.

변비에는 약까지 복용하며 뱃 속을 비워내려 애면글면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탐욕의 부귀영화는 죽는 날까지 쥐고 있으려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비움에 인색한 사람들 중에는 이른바 ‘넘치는 소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가진 놈이 더 한다’는 비아냥들이 필부(匹夫)들의 저자거리에까지 왁자하게 회자(膾炙)되는 것이리라.

국리민복(國利民福)이라는 정치의 존재이유도 망각한 채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 이전투구(泥戰鬪狗)하는 정치인들. 기상천외의 분식회계(粉飾會計)등으로 서민 투자자들의 알토란 같은 돈을 빼돌려 대대손손 부를 세습하는 악덕 기업인들. 남의 집을 빌어 새우잠을 자는 가난한 이웃들을 나 몰라라 하며 땅과 집투기로 서민들을 울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라는 이유로 비움의 미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불행에는 눈과 귀가 막힌 척, 의연금(義捐金)이나 성금(誠金) 한 푼 안내고 도움의 손길 한 번 내밀지 않는 사람들에게, 과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내세우며 사회정의를 주장하고 ‘가진 사람’들의 탐욕을 손가락질할 자격이나 있는가.

오늘 따라 텅 빈 충만으로 더욱 넉넉한 한라산을 응시하며, 아직도 비워내지 못하는 욕심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만추(晩秋)의 저녁이다.

고   권   일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