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칼럼] 북한, 이미 15년전부터 변했다
[김광호 칼럼] 북한, 이미 15년전부터 변했다
  • 김광호
  • 승인 2007.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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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미 15년전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화해와 협력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 것도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남북 고위급(총리)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등 남북합의서가 교환, 발효된 이후 부터다.

물론 가시적인 성과가 없는 립서비스 수준에 불과한 무늬만의 변화였다. 북한은 비핵화를 선언해 놓고, 차근차근 핵실험 준비를 한 뒤 끝내 실행에 옮김으로써 남한은 물론 국제사회를 배신했다.

역시 의문 투성이 김일성(당시 생존)과 김정일의 실체만 확인시켜 준 회담이었다.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비핵화 선언’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의 실망감도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후 서해교전에 이어 핵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파기한 것 말고는 대체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변화의 조짐은 이때 만난 평양 사람들에게서 상당 부분 감지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남한 대표단은 백화원초대소에 묵었다. 1983년 외국의 국빈급 영빈관으로 지어졌지만, 오히려 평양 도심에 있는 45층 특급호텔 고려호텔이 더 유명세를 타던 때라 취재기자단은 내심 고려호텔에 투숙을 원할 정도였다.

대표단 숙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당연하지만, 기자단도 함께 투숙시킨 속셈은 다른 데에 있었던 것 같다. 말로는 ‘예우’ 차원이라지만, 시민과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고려호텔에 묵도록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지금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남한의 기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평양 시민들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숙소 밖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소리없이 변화하는 내부세계의 모습은 기자들의 안내를 맡은 고위 요원들(공무원)과 인민문화궁전 등 회담장 주변에서 만난 대학생, 환영 만찬장의 고위 인사들, 그리고 몇몇 시민들을 통해 많은 부분 직접 파악하고, 귀넘어 들을 수 있었다.

기자마다 1명씩 배정된 안내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행동했다. 행사장에 참석한 시간을 제외하고, 버스에서도 옆 좌석에 앉았고, 심지어 화장실에도 같이 같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어떻든 이들과 같이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도 많았다. 기자들은 진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인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가족 사항, 노동당과 군부의 관계 및 소련 해체 후의 북한정세 전망 등 궁금한 사안에 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거침없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속시원한 대답은커녕 그 어떤 의견조차 표명하지 않고 묵묵부답 일색이었다. 모두 답하기가 껄그러운 질문이라는 듯 얼굴 표정부터 달라졌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남한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해 왔다. 정치분야에서는 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느냐, 정치는 왜 혼란하고, 시위는 왜 그렇게 많으냐는 질문이 많았다. 또, 사회분야에서는 에이즈, 절도, 뇌물 등 부정부패, 퇴폐문화에 대한 질문이 압도했다.

하나하나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하자 대부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자본주의의 병폐가 아니냐고 분석하는 안내원과 대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남한 경제에 대해선 부러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자기들은 미화 50달러면 자식 하나를 결혼시킬 수 있는 돈이라는 말까지 했다.

기자가 만난 사람 중에는 기자들이 입고 있는 양복과 넥타이, 손목시계, 구두에까지 관심을 보이고, 남한의 주거환경, 음식, 월급이 몇 달러에 해당하느냐고 물어 볼 정도로 경제(돈)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15년전에 체제는 달라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다.

북한은 이미 변하고 있다, 변화를 두려워 하는 고위층과 군부 등 권력자를 제외한 상당 수 일반 지식층의 남한에 대한 동경은 15년전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고위층도 급격히 변하는 국제질서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 는 없을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 화담에 이어 며칠 전 정상회담 역시 이런 바탕 위에서 성사됐다.

이제 북한의 남은 걸림돌은 핵과 군부다. 핵이 폐기돼 북.미간 수교가 이뤄지면 군부의 기능도 국제사회의 압력에 밀려 일정 부분 약화될 것으로 생각된다.

기자가 평양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을 포함한 대부분 북한 사람들도 이러한 날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

김  광  호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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