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가까운 사이
[세평시평] 가까운 사이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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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 (列子)에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있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와 그 음악을 참으로 이해한 종자기(鐘子期) 사이에 생긴 말로, 아주 가까운 사이의 친한 벗을 일컫는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아주 정확히 그 음에 맞는 소감과 더불어 비평을 하였다. 후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평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이것을 백아절현(伯牙 絶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가까운 사이의 이웃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면서 위로를 받아왔다.

우리의 나날은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과 끈끈하게 연결된 가운데서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며 도도히 흘러간다. 가까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은 인간에게 베풀어진 크나큰 축복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한 집안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더욱 귀중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웃과의 관계는 특별한 신뢰와 친교가 없이는 성립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한 집안 사람은 설사 그것을 빼도 그 관계에 변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연의 손길로 맺어진 집안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등한시하거나 도외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품속으로 거둬들여야 할 절대적 만남이다.

이와 상응하는 만남에서 신뢰와 친교가 바탕을 이루는 가까운 이웃, 그들은 이미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인생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의 이웃들과 만나면서 인생이 소중함을 체득하고 있다. 서로 만나는 산꼭대기를 향하여 같은 로프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을 신뢰 속에 만나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세파에 시달리는 인생에서 가까운 이웃을 제거해 버린다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벌판에 버려진 미아처럼 방향도 위치도 모른 채 헤매면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래서 “좋은 집에 사는 것보다 좋은 이웃과 사는 것이 낫다.”(서양격언)이 생겨났으리라.

우리에게는 만나 보지 못한 이웃들도 있다. 풍요로운 가을날, 여러 친구와 술잔을 나누고 그들의 죽음의 길을 바라보는 노인들, 오늘 저녁에 어깨를 짓누르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가슴 가득히 느끼는 이들, 붙잡아 줄 손길이 없는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 이들은 가까운 사이에 있는 자리에 초대해 주기를 바라는 이웃들이다. 비탄의 구렁텅이에 있을 때 이웃이 다정하게 건네주는 한 마디 말, 그 목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없다. 이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대자연을 우리의 아주 가까운 이웃의 자리에 초대하여야 한다.

자연은 우리가 마구 훼손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 가까이서 생명을 공유해야 할 이웃이다. 짐승과 나무, 새와 풀벌레가 우리와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생을 찬미하는 코러스를 연출할 때 생명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우리는 굳은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자연을 품어 안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까운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를 느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사이~~~ 최근에 이 말이 혐오와 거부감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다. 위조된 학력과 가짜 박사학위를 집어쓴 어느 여인을 대학교수로 임용하도록 청탁한 것이 고위 공직자였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많은 비리를 음모하거나 꾸며내었다. 그런데 그들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다.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이 말이 어찌하여 그토록 음란하고 부도덕하며, 나아가서는 범죄의 성격을 지닌 뜻으로 변하고 말았을까? 백년도 못 사는 인간의 조그마한 몸이 얼마나 무지한 욕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김  영  환
전 오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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