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잔디가 유난히 곱고 산뜻하게 느껴지는 늦여름 오후, 마당은 크지 않지만 울담 옆에서 집안 정취를 지켜주는 소나무, 비자나무, 감나무, 석류나무, 열대지방의 원산지인 종려나무 등등 ... 에 손질을 하면서 지금은 비교적 많은 나무들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지만 언젠가 나무들을 잘 볼 수 없는 메마른 곳에 살게 되더라도 나의 마음속에서 마음의 나무를 키우고 싶다. 아니 나무가 되고 싶다.
자기가 서야 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서서 사계절의 변화에 적응하는 나무처럼 나도 인생의 사계절을 다 받아들여 적응 할 줄 아는 성실한 시(詩)의 나무, 사랑의 나무, 자비(慈悲)의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나무는 곧 커다란 자연의 섭리요, 시들지 않은 영원한 생의 품속이다.
나무는 꽃피고 열매를 맺는 일만이 아니라, 나무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좋은 룸(room)이 아니라 나무들의 숲 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공자와 노자도 자신의 사상을 나무에서 찾았다.
근본을 의미하는 ‘본(本 )’은 나무 밑에 한 마음을 표시한 것을 뜻한다. 나무를 뜻하는 ‘수(樹)’역시 근본을 의미한다. 노자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박(樸)’도 근본을 뜻한다.
나무는 인간 삶의 기본이다. 나무 없이 인간이 살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나무가 근본임을 알 수 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 집을 나선다. 그들이 집을 떠나는 것은 대부분 쉬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어떻게 쉬면 좋을까. 나무와 더불어 쉬는 게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다. 한자의 쉴 휴(休)는 사람이 나무에 기댄 모습을 본뜬 글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 자에는 ‘아름답다’는 뜻도 있다.
아름다운 모습은 결코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 않다. 그래서 쉴 휴 자에는 ‘검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아름다우려면 나무처럼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리라. 나는 나무에서 삶의 철학을 배운다.
남아프리카의 프로테아 나무는 씨앗이 가득 들어 있는 열매를 고스란히 품고서 몇 년이건 하늘을 보며 기다린다고 한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산불이 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산불의 열기에서만 열매가 터지면서 씨앗을 퍼트려 발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벌도 나비도, 새도 아닌 마른하늘의 날벼락만을 기다리는 나무, 이런 나무는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인간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뿐이다. 이 세상에 열심히 살지 않고 살아남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무를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면 착각이다. 나무는 가장 능동적인 존재이다. 그 어떤 기대도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자, 바로 나무이다.
이런 자만이 창조적이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무는 고독(孤獨)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저녁의 고독을 알고, 함박눈의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한 여름 열기로 내려치는 조작 볕(땡볕)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빛도 얼고 돌멩이도 우는 동짓날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나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기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삶으로 천명(天命)을 다한 뒤 에 하늘의 뜻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哲人)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윤회설(輪回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가 되자고 하였으니, 과실수(果實樹)든, 상록수(常綠樹)든, 활엽수(闊葉樹)든 가리지 않으련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