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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화는 것은 생물체만이 아니다. 법도 사회 변화에 맞게 진화한다.
법은 국가의 강제적 규범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때문에 법은 이러한 기본 정신과 시대 변화에 맞춰 발전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에 역행하는 법이 있다.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 1월1일부터 시행 중인 이 법은 ‘특별재난지역의 선포 및 복구’ 규정을 둬 해당 지역에 대한 지원을 강화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규정과 법의 목적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 법 제1조(목적)는 “각종 재난으로부터 국토를 보존하고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재난.안전 관리체제를 확립하고, 재난의 예방.대비.대응.복구 등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풍수해로 재산을 잃은 국민에 대한 지원 대책은 사실상 전무하다. 도로.다리 등 공공시설 피해 복구에 대한 집중 지원과 달리 농어업인 등에 대한 피해 복구 지원 대책은 극히 미미하거나 아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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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돼도 공공시설 복구비의 국고가 추가 지원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기껏해야 의료.방역.방제 및 쓰레기 수거 활동 등에 대한 지원과 의연금품의 특별 지원 및 농어업인.중소기업 시설.운전자금의 우선 융자 지원, 상환유예.기한연기, 이자감면, 그리고 특례보증 등의 지원이 고작이다.
제11호 태풍 ‘나리’로 인한 제주지역의 피해는 회복 불능일 정도로 심각하다. 제주도가 집계한 농어업.소상공인.중소기업 피해 규모는 모두 1054억원을 웃돌고 있다. 특히 농어업 분야가 782억원대로 가장 피해가 컸다. 소상공업 분야도 263억원대, 중소기업 피해액 역시 52억원대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재해신고 기준에 의한 피해액은 주택 등 사유시설(321억)과 공공시설 등 모두 1299억원에 그치고 있다. 재해 신고 기준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다.
순식간에 농경지가 유실되고, 각종 장비와 시설.상품이 침수돼 못 쓰게 돼버린 도민들의 심정은 말이 아니다. “복구고 뭐고 이제는 살아 갈 방법이 없다”고 한숨 짓는 농민이 어디 한 두명인가.
깊은 실의와 좌절 속에서도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잔뜩 기대했던 이들 피해지역 주민들로선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특별재난지역 지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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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피해 뿐아니라 재산 피해도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제정의 목적대로 지원해야 마땅하다. 목적따로, 실행따로의 법 규정에 회의를 느끼고, 실망하는 사람이 어디 제주지역 태풍 피해 주민들 뿐이겠는가.
더구나 도민들은 풍수해때마다 빚더미에 올라 앉고 있다. 특히 농업인들은 농경지와 비닐하우스 등 시설 복구를 자력으로 해야 한다. 여유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농협 등 금융기관에 다시 빚을 내 농경지와 각종 시설물을 복구해야 한다.
소상공인과 중소기업도 마찮가지다. 운전자금이 우선 융자 지원된다고 하나, 결국 그만큼 부채는 늘어나게 된다. 정부가 농가와 소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재기를 돕는 것 자체는 바람직한 일이나, 만에 하나 워낙 태풍의 후유증이 커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경우 빚에서 헤어나지 못해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금융 지원에 의존한 현행 특별재난지역 지원 규정을 주택 및 공공시설처럼 반드시 국고 지원으로 전환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이번 ‘나리’의 피해는 무분별한 도로 포장과 하천 정비가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막대한 풍수 피해의 원인을 제공해 놓고 “나 몰라라”하는 것은 지자체와 정부가 취할 도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