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30대 싱글 여성이 유부남과 연애를 하다가 아내에게 들켜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녀에게 면회 온 친구에게 언제부터 내 정조(貞操)를 국가에서 관리 했느냐면서 푸념을 토했다고 한다. 섹스는 사적인 영역이니 공권력에서 관여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그녀의 당돌한 발언이 인상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에 대하여 기억되는 사건이 있었다. 60년대 후반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바람둥이 사기꾼이 가짜학력과 가짜신분(사법고시합격자)으로 포장하여 여러 상류층 여자를 농락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가 판결문에서 스스로 보호하지 않은 정조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정조다. 라는 유명한 말로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 당시 크게 유행했던 명언이다. 정조는 개인의 삶에서 공권력이 어느 정도까지는 개입하고 책임을 져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정조(순결)의 가치도 60년 70년대에 비하여 가히 혁명적으로 변하고 있다. 숙명여대 2006년 성의식 설문조사에서 여대생들의 성의식이 상당히 개방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대의 재학생 10명 가운데 7명이상은 ‘혼전 성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설문조사에 의하면 혼전 성관계에 대해 ‘사랑하는 사이라면 무방하다42%,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면 무방하다27%, 조건 없어도 무방하다3.5%’로 긍정적인 답변비율이 높았다.
성에 대한 의식도, 정조에 대한 가치관도 세계화가 되면서 가속도로 변하고 있다. 우리들의 부모세대, 우리가 젊었을 때 가치관이 송두리째 변했다. 우리 부모들의 세대에는 정조는 여자의 목숨이었고 순결은 결혼 할 수 있다는 자격증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편과 사별한 여자는 청산과부로 외롭게 수절을 하면서 한세상을 보냈다. 당시 젊은 여인들은 성욕을 참기위하여 긴 겨울밤에는 찬물로 목욕을 한다든가, 잠자리에서 동전(coin)을 양면으로 놀리는 것으로 젊음의 욕정을 참았으며, 그 동전은 양면이 다 닳아서 돈으로 가치는 없었으나, 이 닳은 동전은 한 여인의 한숨과 좌절과 고뇌의 산출물이었다.
물론 인간의 정마저 허락지 않는 억압과 제약의 성문화가 좋다는 말은 아니다.
쾌락의 즐거움보다 절제로 삶의 맛을 찾았고, 정신건강을 유지했다는 말이다.
내가 젊었을 때, 70년대 초반에도 섹스에 관한 이야기라면 사회에서 터부시 되었다. 특히 여자인 경우 성지식은 거의 무지에 가까웠고, 모르는 것이 미덕이었다. 성적인 내용을 조금비치면 그 여자는 속물이고 이류가 된다. 이류가 안 되고 정숙한 여자가 되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섹스에 대한 말을 하면 바람난 불륜여자로 취급 받을까 걱정하면서 순결은 자신의 생명으로 생각 했다.
이런 유교적인 성문화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경제만 세계화 되는 것이 아니고 문화도 세계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문화가 변하는데 우리만 ‘남녀 칠세 부 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백 년 전의 유교의 교육이념으로 세계문화에 대응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빨리 생활 문화를 바꾸지 말자는 말이다. 가정이 유지되고 결혼의 순결을 지키고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율성이 유지되고, 공공의 윤리가 훼손되지 않은 선에서 성문화는 변화되어야 한다.
혼전에 순결을 지키는 것은 순전히 당신들의 자유이다. 그러나 결과는 당신의 몫이다. 그리고 만족한 성관계는 부부관계는 물론이고 싱글들도 정신 건강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혼하는 부부도 말로는 성격차이라고들 하지만 밑바닥엔 성적불만이 깔려 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수컷과 암컷이 성관계를 즐긴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좋고 사회적으로도 순기능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쾌락은 점점 증가하는 것만큼 기쁨은 점점 적어진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드리고 싶다.
김 찬 집
(수 필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