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서럽기야 고향말고 또 있는가 / 형님은 이제 지쳐 廢屋처럼 앓아 눕고 / 九節草 닮은 누이는 소식 듣고 달려 왔다. // 한 우물 고이듯이 가슴으로 고이는 것 / 그러지 말자해도 눈에 이슬 맺히는가 / 옷자락 한 끝이 풀려 구름결에 가 닿고 // 萬古에 푸른 것이 靑山이라 하데마는 / 실상 고향보다 골 깊은 땅 있다든가 / 이 밤은 등불도 주름져 혼자 흔들리누나.
정완영 시인의 울림이 있는 고향에 관한 시조 한편이다. 우리만큼 고향을 그리워 하는 민족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고향은 ‘태 사른 땅’으로 심성 깊숙이 각인 되고 있다.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고향의 상징은 ‘우리 동네’이며, ‘우리 궨당’이며, ‘코 흘리게 친구’들이다.
그 중에서도 고향의 큰 상징물은 뭐니 뭐니해도 ‘우리 집’이다. ‘고향집’은, 家系史가 대이어 내력을 엮어 오고, 혈육들의 따사로운 정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현대판 유목민들의 유년이 살아 있는 보금자리다. 그래서 정보화 시대인 지금에도 설과 추석 때는 귀성객들이 줄을 이어 고향의 우리 집들을 찾아 든다.
그럼에도 지금은 고향의 우리 동네는 꿩들이 새끼치고 떠나버린 둥지처럼 비어 가고 있다. 우리집도 할망 하르방들의 가래 낀 헛기침 소리만 들리는채 등굽어 가고 있다. 고향의 우리집은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속엔 소슬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어떤 집에 살아 왔을까. 여러가지 설들이 있지만, 인류 최초의 주거는 동굴이었다. 수렵 채취 생활을 하던 초기에 인류들은 동굴을 주거지로 삼았다. 제주의 경우, 제주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된 「북촌리 선사주거지유적」이 동굴주거지이다. 이어서 ‘움막’으로 집은 진화한다.
국가지정 사적 제416호인 「제주삼양동선사유적」이 움집의 대표적 집단 주거지이다. 농경시대에 접어들면서 마을이 집단을 이루어 갔다. 초가집들이 주요 주택이 되어 산업화 시대에까지 그 중심을 이루어 왔다. 그리고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도시는 하늘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80년대부터 아파트가 주택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지금은 아파트 숲속에 살고 있다.
아파트 주거문화시대의 개막은 우리의 의식과 행동과 풍속마저도 바꾸어 놓고 있다. 마을이라는 목가적 공동체 공간은, 아파트 단지라는 밀도 있는 도심공간으로 그 선과 색채가 변해 버렸다. 올래에 정살낭을 걸어 놓고 삼방문을 열어제쳐 살던 개방형 삶의 양식은, 현관문을 단단히 걸어 놓고 사는 폐쇄형으로 뒤바뀌었다.
마을에 잔치나 장례가 나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들어 힘을 모으던 공동체적 생활도 사라지고 있다. 결혼식도 식당에서, 장례도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루어 내는 신풍속이 주류를 이루어 가고 있다. 동네 삼촌, 형님, 누님, 동생으로 불리우던 고향집의 인정사회는 밀려 가고 있다. 매일 얼굴을 대면하면서도 돌하르방처럼 입 다문 고독한 군중들만 움직일 뿐이다.
어디 그뿐이랴. 아파트엔 방만 있고 고향집이 없다. 지붕도 처마도 풍채도 고팡도 우영팥도 마당도 없다. 아파트엔 거실과 베란다와 방과 수세식 화장실과 유리창문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아파트는 편안해서 살기가 좋다고 인기 만점이다.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인 현대인들의 생활에는 더할 수 없는 안성맞춤의 주거 공간이다.
더구나 아파트는 재테크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복부인들의 사정 거리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고향마을의 대안을 생각할 때이다. ‘저지리 예술인 마을’처럼 특성 있는 공동체 마을을 새롭게 만드는 일을 나의 살던 고향을 되살리는 대안시책으로 꿈꾸어 보는 것은, 고향집 잃은 나그네의 향수병일까? 흙냄새 풍기는 땅에 살고 싶다.
시조시인 현 춘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