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무더위
[세평시평] 무더위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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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장마가 물러가더니 이내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무더위는 선풍기 앞에 놓인 바둑판에서도 활개를 치고, 아이들과 어울려 앉은 식탁에서도 꿈틀거린다.

어느 부자의 별장 안에서 잠시 주춤거리던 무더위는 붙잡아 줄 손길이 없는 노인의 15㎡ 방에서 사뭇 맹위를 떨친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도 햇볕은 내려쪼이고, 밭에서 땀 흘리는 여인의 등허리에도 가득히 내려온다.

그러나 공평무사한 하늘이 내려보내는 무더위가 땅에서는 제각기 다른 분수로 받아들여지고, 겪는 고통이 각각 다르다.

하늘의 뜻을 모르는 땅 세상에서는 이 괴로운 더위를 더욱 신명나는 선물로 받아들이는 일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쾌락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펴는 이들도 있다.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걸어갈 때, 무더위는 그야말로 천근의 무게를 가지고 우리를 억누른다.

회색빛 길바닥에서 훅훅 품겨 올라오는 더운 기운만이 아니다.

현대문명이 이룩해낸 각종 생활의 이기들은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처럼 뜨거운 열기를 우리들의 머리 위로 뿜어낸다.

사람들은 이 오만한 더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무더위에서 오는 고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 것 같다. 삶의 현장은 우리를 더욱 짓눌려들게 한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과 공포에서 낮과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보도매체들은 더위를 한층 고조시키는 암울한 뉴스들을 날마다 쏟아낸다.

신선하고 산뜻한 소식을 듣는 것은 시원한 바람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처럼 짜증나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아스팔트의 열기보다도 더 뜨거운 느낌을 체감하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가 그토록 음흉한 칼날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정치 집단의 대변자가 발표하는 성명서에서 절실하게 듣는다.

그들의 말에서 상생과 공존의 시원함을 찾아내는 것보다 오히려 바닷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아내기가 쉬울 것이다.

그들의 언어에는 상대에 대한 증오와 부정과 말살의 음모만이 넘실거린다.

그래서 우리의 더위는 도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은 그것이 극복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게 아닐까?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고… 향긋한 포도주에 단맛이 스미게 하십시오.”(릴케) 풍요로운 가을날, 만물을 성장시켜 온 자연의 섭리에 감격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름의 무더운 햇볕과 그 열대야는 성숙을 위한 과정이다. 석류 열매 속에 보석 같은 알맹이들이 박혀 자라게 한다.

포도가 영글어 향긋한 단맛이 스미는 신비로운 일들의 벌어진다.

자연의 섭리가 베푸는 여름의 대지 위에서 만상은 생동하는 힘을 얻는다.

우리는 무더위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는 동안 아픔을 이겨내는 지혜를 얻으며 푸른 생명의 색조를 체험한다.

그리고 멀지 않은 시간에 신선하고 풍성한 계절이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아무리 기승을 부리더라도 자연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하여 극복될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생활의 고달픔이나 현실의 어려운 상황에서 오는 고통 역시 우리의 슬기에 의하여 더위처럼 사라져갈 것임을 믿고 있다.

“고통은 정신의 양식이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다면 극히 무력한 상태가 오고 말 것이다.”(파스칼)

김   영   환
전 오현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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