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주문화원은 지역의 특색 있는 문화를 발굴하여 이를 계승 보전하고 주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해마다 관내 읍·면을 순회하며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달 26일에는, 안덕면 종합복지회관에서 ‘지방문화 발전세미나’가 열려 지역주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여기에서 발표된 주제 가운데 하나가 ‘항일 교육자 양태교(梁泰橋)선생’이었다. 그는 제주도(島)출신으로는 보기드믄 항일 교육자의 한 사람이면서도, 하마터면 영영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1997년, 당시 제주도교육연구원장이던 김찬흡 선생이『교육제주』에 서홍(曙紅-아호)의 일대기를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홍 양태교 선생은 1907년 대정면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마친 후, 전남사범학교(광주사범 전신)를 졸업하고 1926년부터 전남 장흥군의 한 농촌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였다. 첫 임지인 장흥학교에 발령받은 지 1년 만에, 그는 추자공립보통학교(4년제)로 전보되어 하추자(신양리 소재)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 학교에서 8년 동안 시무한 선생의 교직생활 단면은 그가 남긴 비망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비망록의 서두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어린 싹을 잘 북돋워 훌륭한 개성을 발휘하게 하고, 보다 아름다운 꽃으로 열매를 맺게 할까!”라는 교육자로서의 고뇌와 열정을 적어놓고 있다. 또 ‘학급경영 계획안’에는 “계획 없는 경영은 궤도(軌道)없이 달리는 기차와 같다”라는 글귀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에, 이미 그는 기획(企劃)과 경영이론을 체득하고 학교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서홍은 1935년 3월, 다시 전남으로 전출돼 나주군의 봉황공립보통학교에서 6년간 복무하게 된다. 이 학교에서 그는 일제가 금지한 우리역사를 가르쳤고, 특히 최영 장군·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등 빼어난 선현들을 통해 민족정기를 심어주려 하였다. 곱디고운 동시를 지어, 우리말의 우수함과 삼천리강산의 수려함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서홍은 일본귀신 신주를 불태우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를 빌미삼은 일제는 그를 제주도의 산간벽지학교인 안덕면 동광간이학교로 좌천시킨다. 이 학교에서도 선생의 항일투쟁은 계속된다. 1941년 5월, 전쟁준비에 발광하던 일제는 도내 전 교직원을 모아놓고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전시 하 교육자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이때 그는 “온갖 탄압과 민족차별을 자행하는 일본이 어찌 그런 위선적인 말을 할 수 있느냐”며, 당당하게 맞서 논쟁을 벌였다. 이 사건이 있고 난 뒤, 그는 일경의 억압으로 결국 사표를 내던지고 만다. 동광간이학교에 부임한지 6개월만의 일이었다. 양태교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투철한 조국애와 교육열 그리고 깊은 신앙심’으로 학생들을 훈도(薰陶)하며 37년의 짧으면서도, 결코 짧지 않은 아름다운 생애를 살다간 한 시대의 대표적인 스승이다. 서홍의 교육관은 철저한 민족의식과 기독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사랑과 진실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민족혼과 독립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일반 민중의 문맹을 퇴치하는데 힘썼는가하면, 환자와 임산부의 출산까지도 지성으로 돌보아 주었다. ‘참 스승’이 없다고 한탄하는 요즘, 양태교 선생이야말로 ‘살아있는 사표’로서, 전 세기와 금세기의 교육을 잇는 ‘큰 다리(泰橋)’로서, 우리들에게 오래도록 교훈으로 남아 기억되어야 할 터이다. 그의 요절은 심한 고문 후유증에 기인한 것이라는 전언도 있다. 이번 양태교 선생을 재조명해보는 세미나는 마침 금년이 서홍 출생 100주년이자, 자료 발굴 10년이 되는 해여서, 더욱 그 의의가 컸다. 이 자리에서는 고창석 전 제주대학교 교수의 ‘면리제도의 변천과 안덕면’이라는 주제 발표도 있었다.
溪山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