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한쪽을 앞에 놓고 두 손 모아 감사 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농부의 식탁… 나는 이런 그림을 보면 감심(感心)이 된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식탁이지만 그의 마음은 한없는 감사와 넉넉함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사람의 심성이고 행복한 마음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서로간의 한 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은 내가 있음을 모른다. 병든 영혼을 놓아둔 채 화려함과 명예와, 부와, 유흥으로 유혹하는 거리에서 방황하며 채우고 채워도 허전하기만 한 내가 있음을 모른다. 이런 부질없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감당하기 힘든 생의 고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삶의 수레바퀴에 낀 흙덩이처럼 산산조각이 났을 때 자신을 발견 된다. 이건 과도한 욕심(慾心)이 자초한 것이다. 요즘 신문 방송 기사를 보면, 우리 모두가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정형(定型)의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야단이다. 삶의 형식이나 가치의식, 얼굴의 모양까지 유행의 틀에 끼여 맞추려고 한다. 이런 과정이 인생 삶인지도 모른다. 좌절, 결핍과 고통은 상대적으로 인생에 깨달음을 준다는 어느 문인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감정의 질곡과 고통을 맛보면서 생의 깊은 맛과 깨달음에 이른다는 말이리라. 상처 난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고, 어떤 성격의 창조든, 인생의 성숙이든 그 뒤에는 엄청난 양의 고통과 아픔이 수반됐음을 우린 알 수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 화가, 음악가, 철학자, 모두가 한결같이 그들의 일생을 적은 자료를 보면 조실부모, 실연, 가난, 불구, 병마 등 어쩌면 그리도 고통과 괴로움이 연속이다. 하기는 물에 빠져본 오리만이 물의 깊이를 알 수 있듯이 고통과 괴로움에 빠져본 사람만이 인생이 깊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극작가 뒤마의 유명한 작품 <몽테 크리스토 백작>의 마지막 부분에도 이런 말이 있다. “극도의 불행을 겪은 사람만이 가장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인생이란 고뇌와 고통, 불행만이 생의 성숙(mature)과 겸허(humble)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을 만나서 고뇌할 때만 그 고통의 과정을 뛰어넘는 생의 성숙단계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린 어쩌다 잠이 없는 밤, “나는 누구인가”를 묻다보면 내면을 향한 길은 때론 천길 절벽에 서있는 듯 혹은 사방을 가늠할 수 없는 황야에 홀로 놓인 듯 아득하고 절박한 심정일 때가 있다. 이를 외면하고 싶은 욕심과 모순으로 가득 찬 ‘나’를 통찰해 봄으로써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나’가 있음을 안다. 남의 아픔을 진정 내 아픔으로 느끼며 다른 사람들과의 정과 평화로운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는 열린 나일 때, 감심(感心)이 될 뿐 아니라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오랜 세월 이기심과 욕심으로 오염된 내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또 다른 나 자신과의 대화로써 나의 본래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나의 어머니 같은, 고향 같은, 어린시절의 추억 같은 이 소중한 길을 찾고 싶다. 이것만이 나의 마음의 감심(感心)을 유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정보화, 도시화와 함께 일상의 관계가 스피드(speed)하게 되면서 우리들의 정신세계는 삭막해지고 무너져 가고 있다. 살벌하리만큼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사람의 심성은 메마르고 있다. 조폭 동원한 폭력, 난폭한 시위, 이익계층의 파업, 치열한 경쟁… 이런 걸 다보고 듣고, 그때마다 마음의 충격으로 건강한 사회정신은 마비되고 있다. 이 걸 치유하는 길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절실한 물음이다. 이 물음이 ‘자아상실’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나의 정체를, 그리고 정신적으로 돌아가 머무를 수 있는 나의 본래자리를 찾아서, 내 마음도 편하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감심(感心)이기 때문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