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올바른 미래를 가질 수 있다. 누군가가 한국을 ‘학살의 백화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발생한 학살사건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 2003년 4월 25일부터 26일까지, 미국 하바드대에서는 ‘제주4?’을 주제로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4?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거론한 미국 시카고대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 교수가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4?관련 학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여기서도 학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커밍스는 1960년대 후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서 생활하였다. 그 후 그의 역작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을 수정주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집필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현대사 연구는 커밍스 콤플렉스나 커밍스 알레르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저서는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권장도서로 선정되었으며, 그의 이런 연구 결과는 80년대 이후 국내외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커밍스는, 특히 ‘김정일 코드’라는 저서를 통해 ‘북한’을 집중 분석하였다. 그는, 북핵의 뿌리는 한국전쟁에 있으며, 미국은 북한 지역에 1백만 갤런의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20여 곳의 주요 도시를 초토화하였으며, 스스로 민간인을 학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북한과 북·중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30~50개의 원자폭탄 투하를 추진했고, 트루먼 대통령도 나중에 이를 승인하였으며, 미국은 핵탄두를 제거한 원자폭탄을 평양 인근에 떨어뜨리며 원폭투하 연습까지 했으며, ‘북한핵은 부시가 만든 폭탄’이라는 분석도 내놓았다.
특히 커밍스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를 비롯한 미국의 엘리트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 장악을 지지한 대가로 상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고 비판하였다. 스칼라피노 교수의 경우, 광주 민주화운동을 한 달 앞둔 1980년 10월 한국을 찾아 전두환 체제를 사실상 지지했고, 대우그룹 고문으로 고용돼 연간 5만 달러의 자문료를 챙겼다는 것이다. 리처드 홀브룩 당시 동아태 담당 차관보, 미 국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 닉슨 정권의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 등도 같은 시기에 한국 대기업의 고문으로 채용됐으며, 이들 모두 전 정권을 지지하였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홀브룩 차관보의 경우, 광주에서 많은 생명의 희생이 벌어졌을 때,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독재자에 대한 인내와 북한에 대한 우려를 조언했다고, 그는 밝혔다.
이처럼 커밍스의 메시지는 비교적 간명하다. 그는 북한 역시 또 다른 하나의 ‘국가’(North Korea:Another country)라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강압적 국내정치나 호전적 대외정책으로 보아 북한이 혼란스러운 나라임에는 틀림없으나 잘 살펴보면 수용 가능한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나라라는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은 이런 인식 위에서 비로소 첫 삽을 뜰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최근 커밍스는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후광 김대중 학술상’은 전남대가 김대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하였다. 그는 1985년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씨가 신변안전 보장을 받지 못하고 귀국했을 때, 김씨를 호위하듯 김포공항까지 동행해 함께 비행기 트랩을 걸어 내려왔다. 그래서 광주시민들은 그에게 강한 동지의식을 갖고 있다. 지난달 그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은 그를 뜨겁게 환영하였다.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 숨 막히던 군사정권 시절, 판매금지 도서목록에 끼워져 있어 우리들은 당국의 눈을 피하며, 그를 답습하노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당시 그는 한국정부의 대표적인 기피인물이기도 했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