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의연한 지도자를 원한다
[세평시평] 의연한 지도자를 원한다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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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아니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더욱 현실적일 것이다. 행복이란(?) 느끼기 나름일 것이다.

중용이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는 상태, 이를 행복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까. 이론과 실천의 지속적 병행을 통한 자기실현이라 말한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중용이 덕의 핵심이라고 설파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옮겨본다. “명예와 불명예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긍지요, 그 과도는 이른바 허영이요, 그 부족은 비굴이다. 노여움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온화요, 그 과도는 성급함이며, 그 부족은 성질 없음이다. 진리의 중용은 진실이요, 그 과도는 허풍이며, 그 부족은 거짓 겸손이다. 돈을 주고받는 일에서 중용은 너그러움이며, 그 부족은 인색함이고 그 과도는 방탕이다. "이같은 중용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젖은 행동의 습관화라고 했다. 일시적으로 어쩌다가 우연하게 중용의 덕을 행했다고 하여 항구적일 수 없는 것이다.

시종일관한 자세, 언제 어디서나 중용에 맞는 언행, 유덕한 행동을 거듭하는 가운데 덕의 습관, 중용의 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중용의 습관에 맞춰 신뢰성 있게 항구한 삶을 사는 자를 일컬어 인격자라 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회에 인격자란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가운데 중(中)’은 산술적인 평균치가 아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대상-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와 자세로’ 어떤 정념을 느끼는 것이 참된 중용이요, 덕이라 했다. 절제와 용기도 마찬가지이다.

모자란데서 나오는 비겁과 과한데서 오는 무모함 사이에서 중용의 도를 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일관된 사고와 실천을 통한 지속적인 습관화에서 얻을 수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인간 도리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 가정과 자기가 사는 마을, 지역사회, 국가, 온 인류 등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기여를 강조했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한 제주 지역사회의 몸부림이 참으로 가열찬 요즘이다. 최근 들어 갈등의 골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제주지역사회는 중용지도(中庸之道)의 덕을 지닌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절제와 용기, 정의감을 지닌 의연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권부의 의중을 충실히 따르고 일신상의 안위를 위하여 신의를 저버리는 지도자는 도민들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

비굴함과 조급성, 도민 무시의 지도자, 그러한 리더십이라면 이미 존재 가치를 잃은 것이다.

환골탈태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다시, “당신은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에 우리는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고 수조원의 유가증권이나 부동산 자산가라 한들 행복의 가치를 모른다면 그 지위나 재산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행복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라고 말한 세익스피어의 말을 곱씹어 본다.

그리고 항상 정의감에 불타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최면을 걸어볼 일이다. 아직 만족할 만큼 채우지 못하여 희망이 있으므로 행복하다고.

최후의 순간 심판날에 이 세상 빛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정의의 주님의 도우심으로 하여 진정 행복했었노라 고백하리라.

안   창   흡
언론개혁제주포럼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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