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6ㆍ25를 다시 생각 한다
[세평시평] 6ㆍ25를 다시 생각 한다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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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6월. 현충일과 6.25가 들어있는 달이다. 이제 6.25 쉰일곱 돌을 맞으면서, 당시 집권층과 군 수뇌부는 민족의 수난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터이다.

먼저 북한에 대한 정보부재와 안일한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쪽은 구소련(蘇聯)의 절대적인 관여아래 남침준비를 하면서, 38선을 통해 잦은 도발을 자행하였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을 수시로 불러 대책을 논의한다. 이에 대한 답변이 가관이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저들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초전에 분쇄하여 아침은 해주(황해도)에서, 점심은 평양(평남)에서, 저녁은 신의주(평북)에서 먹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허언장담(虛言壯談)하던 이들은 6?5가 발발하자, 겨우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고 만다. 전술 전략도 엉망이었다. 북한군은 우리에게는 없던 탱크를 몰고 침략해왔다. 이 신무기 앞에 국군은 무력(無力)하였다. 그러나 전차 ·장갑차는 장애물(障碍物)앞에선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 탱크의 길목을 깊게 파헤치거나, 바위더미 같은 장해(障害)장치를 했더라면 북한군의 남진은 그만큼 지연되었을 것이다. 군 당국은 또, 후퇴를 거듭하면서 북측의 도강(渡江)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그렇지만 옹졸한 작전의 표본이라고 해야 할까, 애꿎은 우리 시민들만 인명피해를 당하였다. 이에 더하여 정부는 자신들은 남쪽으로 피신하면서도 ‘친애하는 서울시민과 애국동포’들에게는 “우리 국군이 괴뢰군을 즉각 궤멸시킬 것이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계속 내 보냈다. 그것도 생방송이 아닌 녹음테이프였다.

대전까지 내려온 뒤, 다급해진 노(老)대통령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우리 군의 작전 지휘권을 이양하고 만다. 이 때문에 우리는 수십 년간 자체 작전권이 없는 상태로 있어 오다, 1994년에야 비로소 ‘평시작전권’을 환수하였다. 지금은 ‘전시작전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변 중에 군사 주권을 실권(失權)한 우리는 직접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 휴전회담에서 정식 대표가 아닌, 이른바 옵서버로 참여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부산으로 천도한 정부와 집권세력의 작태는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치열한 전투,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들은 정권연장과 장기집권에만 집착함으로써, 우리 군경의 우국충정과 고결한 희생을 철저하게 짓밟아 놓는다. 결국 자유당 부패정권은 전 국민적인 분노에 부닥치면서 4.19학생 의거로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기들만 비열하게 피난길에 나섰던 정부는 정작 서울이 수복되자 어떤 행태를 취했는가. 90여 일 동안 적치하(敵治下)에서 신음하던 시민들을 위무하기는커녕, 오히려 책임을 전가하며 범법여부를 추궁하는데 만 급급해 하였다.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썩어빠진 정치인은 아예 발붙일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물론 국민의 투철한 조국사랑이 우선이지만,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는 일 역시 중요하다.

20·30대들에게 9.28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거의가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수도 서울을 도로 찾은 ‘기념비적인 날’을 모른다니 어찌 근심이 아니 되겠는가. 이러다가는 앞으로 6.25마저 기억에 없다고 하지는 않을 런지.

해마다 6월이면 호국영령께 숙연히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분들에게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선열의 숭고한 순국이념에 십분의 일도 보답을 하지 못하고 있기 까닭이다.

溪山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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