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온도계의 수은주가 키를 키워가는 요즘, 학교 숲의 풍경도 하루가 다르게 갈맷빛으로 깊어갑니다. 봄의 전령사였던 매화와 철쭉, 목련들이 다녀간 뒷자리에서, 싸라기눈같이 하얀 피라칸사 꽃망울과 보라빛 산수국, 빨간 병솔꽃, 자주빛 꽃창포들이 짙은 녹음 사이에서 함초롬히 피어나, 정해년 가는 봄이 마냥 섭섭지는 않습니다.
특히 학교 울타리를 따라 노란 물결로 출렁이는 금계국 꽃잎에선, 벌써 초여름의 징후가 읽힙니다. 들풀같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세상을 샛노랗게 채색하는 금계국은, 봄과 여름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계절의 눈금같은 꽃으로, 머지 않아 금계국 꽃이 지는 날, 올 봄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고, 대신 초여름의 햇살이 교정을 달굴 것입니다.
요즘 같은 봄날, 신록의 푸르름을 닮은 여고생들과 함께 학교 숲을 완상(玩賞)하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더구나 ‘학교 운동장에 왠 숲이냐’는 주변의 우려와 저항을 달래며, 황량했던 유휴공간에 숲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던 저로서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유유자적 숲을 거니는 모습을 보면서, 남몰래 가슴 벅찬 보람을 느낍니다.
더구나 하늘 길을 지나던 새들이 꽃나무에 앉아 숨을 고르고,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나비들이 꽃 속에 몸을 던져 꿀을 따는 풍경은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스러운지, 우리학교 숲에 와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마 상상이 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 숲이 성장(盛粧)을 거듭할수록, 한 편에선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도 깊어갑니다.
겨울 동안 삭막했던 학교 숲에서 기적처럼 푸른 기운이 언뜻언뜻 내비칠 즈음이면, 해마다 발병하는 일종의 ‘ 알러지’ 증상인데, 다름 아니라 학교 숲에 번지는 잡초들을 뽑아낼 걱정 때문입니다. 당초 학교 숲 조성을 시작할 때도, 그런 걱정을 안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 공간이니만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잡초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학교 숲을 통한 정서순화와 인성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생태가 살아있는 숲을 가꾸어가는 노작교육(勞作敎育)을 병행하는 교수ㆍ학습과정안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목표가 벽에 부딪히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연환경의 중요성과 노동의 신성함을 역설하며, 학생들의 의식전환과 실천을 강조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결국 일 년에 서너 번 특별히 시간을 내어 잡초제거를 하고 있는데, 그 때에도 소극적으로 일관하려는 아이들에 대한 동기부여의 궁여지책으로, 학교 내 봉사활동 시간 부여라는 당근을 투입하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몇몇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아예 학교 숲 관리를 외부업체에 맡기자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일부러 귀를 닫고 있습니다. 빠듯한 예산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주인인 학교 숲이라면, 당연히 관리 책임도 학생들에게 있다는 게 양보할 수 없는 저의 소신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의 소중함을 절감하지 못하고 자라나는 요즘 젊은 학생들에게, 학교 숲에서의 노작교육은 모처럼 체험을 통해 노동의 의미를 일깨워줄 수 있는 산 교육의 학습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손과 발까지 대신해주는 부모들의 과잉보호 아래서 자라난 학생들에게, 흙을 묻히고 땀을 흘리게 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노동의 의미와 즐거움을 일깨워주지 않는다면, 장차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농부들의 더운 땀방울로 수확한 먹거리를 먹으면서도, 해녀들의 질긴 숨비소리로 캐어낸 해산물을 먹으면서도,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노동을 통해 왔는지를 모른다면, 앞으로 누가 농부가 되고 해녀가 되어 우리의 밥상을 채울 것입니까. 누가 생산현장의 노동자가 되려 하겠습니까.
사실 심각한 사회문제로 확산일로에 있는 청년실업문제도, 그 기저에는 어릴 적부터 누적되어 정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노동에 대한 뿌리 깊은 거리감과 혐오감이 자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너도 나도 힘든 육체노동을 기피하다 보니, 화이트 칼라로 대표되는 대기업이나 공무원같은 사무직만 선호하게 되고, 중소기업, 특히 3D업종에서는 국내에서 노동력을 제공받지 못해, 울며겨자 먹기로 외국의 노동자를 채용해야하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학생들은 물론 일부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학교 숲의 모든 관리를 반드시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힘들고 서투르며, 퇴비 냄새에 코를 싸쥐는가 하면, 선생님의 지도가 안 닿는 곳에서는 공들여 심은 야생화까지 잡초로 잘못 알고 뽑아버리는 철부지 학생들이지만, 3년 동안 학교 숲을 가꾸다 보면 진정한 자연친화와 함께, 노동의 의미와 보람을 체득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인간과 세상의 발전적 변화를 이끄는 힘, 그게 바로 교육의 힘이며 교육의 존재 이유입니다.
고 권 일
삼성여고 교장/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