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이별, 혹은 이혼을 “거울이 깨진다.(破鏡)”고 하는데, 여기에는 매우 슬픈 사연이 전해진다. 부부가 헤어져 살아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헤어지는 마당에서 거울을 꺼냈다. “우리가 이별하면 부부의 사랑은 중단될 것인즉, 그래도 미진한 정이 있어 만나고 싶으면 무슨 신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거울을 두 쪽으로 잘라 하나씩 지니고 가게 되었다. 이것을 파경지탄(破鏡之嘆)이라고 한다. 나중에 아내에게 애인이 생기자, 그녀가 지니고 있던 거울 반쪽이 새가 되어 남편에게로 날아갔다는 이야기이다. 부부는 두 개의 반신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이다. 1+1=2가 아니라 1+1=1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개성이 반은 죽고 반만 살리는 것이다. 반을 죽인다는 것은 희생이요, 반을 살린다는 것은 사랑이다. 희생과 애정으로 합쳐질 때 부부는 하나의 건강한 세포가 되어 우리의 삶을 풍성히 자라게 할 것이다. 이런 부부 사이에 갑옷으로 무장할 필요는 없다.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서정주) 눈빛과 손동작 하나에서도 부부는 포근한 체온을 만들어 갈 것이다. 부부는 대자연의 섭리로 이루어진 인륜의 시작이다. 수10억원 짜리 부동산은 이익으로 인연이 맺어졌지만 남편과 아내는 자연의 섭리로 맺어졌다. 이익으로 맺어진 것은 위급하면 버리지만, 자연으로 맺어진 것은 위급하면 거둬들인다. 그러니까 부부는 시련을 당하거나 위급할수록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져 버리는 곳에 우리의 쓰라린 비극이 있다. 이혼하는 부부가 계속 늘어나는 게 그것이다. 때로는 연예인들이나 유명인들의 이혼이 매우 흥미진진하거나 신선한 뉴스로 크게 보도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고장의 이혼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모두가 생명과 신뢰를 경시하는 풍조인 것 같아서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위급하면 끌어안아야 할 부부가 위급하기도 전에, 아니 오히려 자신을 뽐내기 위해 서로를 배척해 버리는 것이다. 거기에 미련이나 아쉬움의 흔적은 장식용으로 쓸 것도 없다. “너보다 잘난 남자(여자) 만나 살면 되는 거야. 빠이빠이.” 이런 가사로 된 유행 가요가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흔히 대중가요는 그 시대의 세태를 집약적으로 반영한다고 말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서민들은 삶의 애환을 노래에 실어 마음을 어루만지며 살아왔다. 노래는 꿈과 현실 사이의 중재자였으며, 현실의 고달픔을 곡조로 소화시켜내기도 했다. 이러한 대중가요를 통해 우리는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한 유행가의 노랫말은 오늘의 세태를 아주 잘 반영한 것이라고 말해야 되는가? 서슴지 않고 이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은가 한다. 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 더 잘 살기 위하여 주저도 미련도 없이 헤어지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이혼해야 하는 슬프고 쓰라린 고뇌의 사연이 있는 경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으로 성숙하기까지는 숱한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부도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이 결합하여 성숙한 가정을 이루어가는 과정에는 꽃밭만이 아니라 가시밭길도 가로놓일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이 시련을 극복해 나아가는 한 몸이다. 잘난 사람 만나 잘 살기 위하여 돌아서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신약성경)
김 영 환
전 오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