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남 칼럼] 민주독재자의 언론 통제
[김덕남 칼럼] 민주독재자의 언론 통제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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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봉쇄가 언론 선진화 방안

CPJ는 ‘언론인 보호 위원회’라는 국제 언론단체다. 뉴욕에 본부가 있다.

이 단체가 지난 2월 4일 매우 의미 있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2006년 언론에 대한 공격’이라는 제목의 연례보고서다. “선거로 선출된 민주독재자들이 민주주의의 틀을 시늉하면서 언론을 억압하는 새로운 언론통제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다.

여기서는 퓨틴 러시아 대통령과 차베스 유고 대통령을 대표적 민주독재자로 거론했다.

이로부터 3개월 18일이 지난 5월22일, 노무현 대통령주재의 국무회의에서는 취재관련 공간을 축소하고 기자 출입을 제한하는 내용의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라는 언론정책을 확정했다.

어떻게 취재를 제한하면서 취재를 지원한다고 할 수 있으며 후진적이고 독선적 조치를 선진화 방안으로 포장할 수 있는가. 말만 그럴듯한 사실상의 ‘취재봉쇄 시스템’이며 ‘언론정책 후진화 방안’이나 다름없는 부끄럽고 비민주적인 언론정책이다.

"처음으로 대 통합 이뤘다" 냉소

이 정책이 발표되자 나라안이 뒤끓고 있다.

‘친노 반노’를 불문한 각종 언론매체는 물론 여야정치권, 각급 언론단체나 시민사회단체가 망라돼 반기들고 일어서서 비판하고 있다.

참여정부 지지그룹이나 비판그룹에 관계없이 이처럼 한 목소리로 정부정책에 비판과 반대를 했던 경우는 없었다.

오죽해야 말 비틀기 호사가들이 이에 대해 “노대통령이 임기 내내 편가르기로 갈등과 분열만을 일으키더니 처음으로 국민적 대 통합을 이뤄냈다”고 냉소를 보내고있겠는가.

그것은 언론정책에 대한 비아냥거림일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쳤다”고 해도 그것이 도둑질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이번의 언론정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취재지원 시스템’이니, ‘선진화 방안’이니 하면서 립스틱 짙게 발라 헛소리해도 그것으로 언론통제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언론자유 침해의 명분을 얻을 수도 없다. 까마귀가 흰 페인트를 뒤집어썼다고 백로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잘못된 언론정책 철회 마땅

새삼스레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언론의 자유는 모든 자유를 가능케 하는 자유’라는 소리도 새삼스럽지 않다. 언론의 존재이유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에 있다. 자유민주주를 일구는 토양이며 자양분이다.

언론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가장 소중한 민주적 가치며 자산이기도하다. 그러기에 정부가 각 부처 기자실을 통폐합하고 관청사무실 출입을 제한하는 사실상의 ‘취재봉쇄 후진화 방안’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신종 언론 통제의 언론탄압 정책이다.

민주적 가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우려할만한 사건이다. 대통령의 ‘화풀이 말씀 한마디’가 한 나라의 언론정책이 되는 나라는 제대로운 나라일수가 없다.

그것은 세계가 웃어버릴 후진적 코미디일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법의 지배가 아닌 통치자의 지배 아래 있으며 나라의 구조가 대통령을 ‘선출된 독재자(elected autocrat)’로 만드는 구조”라는 외신의 비판도 있었다.

앞에서 인용한 CPJ라는 국제 언론 단체가 ‘2007년 언론 연례 보고서’에서 만에 하나 대표적 ‘민주 독재자’로 노무현 대통령을 거론한다면 모닥불 뒤집어쓰는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래서 이번의 잘못된 언론 정책은 당장 철회함이 마땅하다. 세계적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제발 그래야 한다.

김   덕   남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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