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란 ‘못 쓰게 되어 내 버리거나 버릴 물건이나 배설한 오물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이런 쓰레기는 가정이나 조직 길거리 어디서나 발생한다.
물질문명이 발달되면서 쓰레기 발생이 그 만큼 많아지고 있다. 이것을 처리하는 매립장과 소각장, 인분과 축산·공장·분뇨·폐수처리시설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시설반대 님비현상이다. 쓰레기란 말은 생활과 가장 밀접하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말과 달리 쓰레기란 용어의 사용범위가 넓어졌다. 원시시대로 시작, 농경문화에서는 쓰레기의 발생양도 적었지만 발생해도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일반쓰레기발생량이 적고, 인간이나 가축 배설물은 작물의 비료로 사용되고 그 생산물은 사람과 가축이 소비했다. 즉 ‘생산-소비-배설-비료’란 순환과정으로 해결됐다.
지금과 같이 분해가 안 되는 합성물질은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인구의 증가와 과학의 발달 등 산업혁명에 의한 대량생산-대량소비-쓰레기 대량발생, 도시화가 되면서 쓰레기양이 많아져서 순환처리가능한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40-50년 전만해도 환경문제의식이 적어 쓰레기가 발생해도 바다나 뜰에 버려도 말이 없었다.
지금도 땅이 넓은 나라는 쓰레기를 사막이나 바다에 버리는 나라가 많다. 최근 언론보도에 의하면 군사기지폐쇄지역에 방치한 폐유 등 오물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선진 미국이 이럴 수 있느냐이다. 한편 선진국도 마찬가지란 서글픈 생각이 든다.
우리 동네 소위 선진‘클린하우스’란 쓰레기처리시설을 이용하면서 일부 시민들이 분리수거도 잘 안하고 마구 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문제는 분리수거를 장려하면서 수거차량의 분리수거가 제대로 안 된다. 길거리나 공중장소에서 쓰레기를 하수구에 버리고, 금지된 곳에 마구 방기하는 것을 보면서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축산오물을 하천이나 숨골로 마구 내 보내는 몰염치한 사람을 보면서 무서운 업보를 생각한다. 쓰레기가 이런 사람을 보면서 당신은 쓰레기 만도 못하다고 할 것 같다. 쓰레기 중에 재활용이 가능한 폐유, 폐휴지, 유리, 플라스틱 등은 차량연료나 용도에 따른 재활용품을 생산하는 비율이 50%를 넘어섰다고 한다.
노력에 따라 그 폭은 더 넓힐 수 있다. 집중 연구 발전시킬 최우선 분야다. 쓰레기처리의 선진화는 민도의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쁜 의미에서 쓰레기와 같은 비인간적인 사람을 두고 ‘쓰레기’란 별명을 쓴다.
그 만큼 쓰레기와 같이 버림받을 자가 인간의 얼굴로 처신한다는 이야기다. 즉 인간답지 않는 행실을 일삼는 상습거짓말쟁이, 사기겫蘆에ㅖ着? 살인·강간·폭력·인질·기아·棄兒·기로棄老, 지능적인 부정·부패, 가정파괴범, 학교·군의 폭력, 공금의 횡령·낭비 등 인성을 상실한 악한 사람을 가리켜 인면수심인 ‘쓰레기’라 부른다.
추가하면 조직문화에서 자기책임은 남, 권한행사는 독점하는 상사, 다른 부서나 남의 일에 협동을 외면하는 동료, 건축 등 종합민원처리에서 부정면만 부각, 부담과 고통을 주고, 자기는 면피·협잡을 일삼는 공직자, 남이 쓴 글의 표절을 일삼는 학자 등도 같은 부류다. 민원인의 입장을 역지사지 처리하라는 공복의식이 상실된 몰지각한 자이다. 이런 사람은 문제해결에 능동성, 제도시행을 기피하고 안 되는 쪽으로만 해석하려든다. 이런 사람은 적성검사를 거쳐 적성배치 조정을 해야 한다.
민원처리는 행정의 얼굴이다. 길지 않는 인생, 좋은 일을 하다가 가도 부족한 삶인데 양심을 속이고 세상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불쌍한 존재다. 최근 들어 자기에게 정성을 다하여 키운 부모나, 자기자식을 버리는 사람, 친구의 의리를 이용하고 헌신짝 같이 버리는 악우, 은공을 악으로 갚는 망덕들도 같은 쓰레기들이다. 당한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면 자신을 버리고, 학대하는 자식을 위하여 살신성인하는 부모나 조상도 많다. 부모에게 폭행한 폐륜아를 감싸고 기도하는 부모를 본다.
쓰레기청소는 ‘뉴 제주운동차원’에서도 핵심과제이다. 쓰레기의 분석과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무생물인 쓰레기처리도 잘 하고 사회에서 지탄 받는 인간쓰레기 처리도 잘 하여 깨끗한 사회, 조직문화가 이룩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말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하루 속이 실현되었으면 한다. 다 함께 자기부터 換骨脫態로 반성·실천하고 쓰레기의 제 모습으로 治癒에 의한 변화이다. 실천을 통한 밝은 사회, 새 역사를 창조하는 데 졸필이 종소리로 퍼지데 기여하기를 기대해본다.
김 계 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