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는 삶과 예술의 농축이자, 모국어의 맥박이다. 그러나 한국시의 위상은 점점 위축되고 있으며, 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시집은 팔리지 않고, 독자들은 시를 버리고 영상물을 탐닉하기 시작하였다.
무수한 시어가 범람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절창도 사라졌다.
이런 와중(渦中)에 시단(詩壇)에 불어 닥친 ‘미래파’ 논쟁으로 독자들은 더욱 혼란스럽고, 시인과 평론가들은 이 논쟁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시인 황병승의 시 ‘커밍아웃’의 전반부다. ‘커밍아웃’에는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보다 진실하게 이해하자는 의도가 깔려있다.
그리고 소수자의 성에 대한 편견을 바르게 인식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이처럼 미래파 시인들의 시를 읽고 있으면, 길고 낯설고 섬뜩하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주목받는 몇몇 젊은 시인들의 낯선 어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기보다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새로운 세대가 생산하는 시는 요령부득의 장광설이거나 경박한 유희의 산물이 아니”라며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라는 주장까지 펼친다.
흥미로운 것은 미래파 시인 숫자가 계속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장석원, 황병승, 김민정, 김행숙. 김언. 이민하. 유형진. 이장욱 등이 미래파에 속한다.
이장욱은 ‘창작과 비평’ 편집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미래파의 시가 ‘다시 읽기’를 요구하는 텍스트가 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들의 시가 재독(再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데 있는 게 아니라, 그런 독서의 과정이 얼마만큼의 보람을 독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솔직히 필자는, 이들의 시는 소통을 거부하는 자기중심적 시 쓰기의 극단에 있으며, 이제 독자와의 소통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칭과 시제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극단을 추구하는 갖가지 실험 자체가 미래파의 시세계라면 정말 미래가 황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미래파는 실체가 없다. 다만 편의적인 용어일 뿐인데, 일종의 문학사조로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환상성은 미래파 시인들의 시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미래파의 원조는 대체 무엇일까? 미래파는 원래, 20세기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이다.
1909년 이탈리아 시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가 프랑스 파리의 신문 ‘피가로 Le Figaro’ 에 미래파 선언을 기고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이탈리아 미래파보다 한층 더 정치?사회적 색채를 띤 러시아 특유의 미래파가 뿌리를 내렸다.
이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는 에즈라 파운드, D. H. 로렌스,조반니 파파니 등이 있다. 시인 황동규는 “미래파는 20세기 초엽 이탈리아 예술운동의 이름이다. 이미 존재하는 명칭을 오늘의 한국 시인들에게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황병승을 비롯한 일단의 젊은 시인들이 한국 시단의 숨통을 터준다는 의미에서 ‘숨통파’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 제주 시단에도 숨통파 시인은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들이 제주 시단에 숨통을 터주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지역 평론가들의 입장이 매우 궁금하다.
그렇지만 제주지역에서는 숨통파 시인을 골라내는 일에서부터 그들을 비평할 평론가들이 아직 용트림을 하고 있지 않으니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이봐 이쯔이, 거울 밖의 네 얼굴은 꼭 내 얼굴 같구나/ 우리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지만/ 단 한 번의 키스도 나눌 수 없어/ 이제부터 나는 기다란 수염을 달고/ 아무런 화면도 보여주지 않을 거야” 역시 황병승의 시 ‘버지의 계절’ 일부다. 동성애를 암시하고 있다.
오늘은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숨통파 시인들의 시를 찬찬이 읽는 일부터 시작해볼까?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