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애틋하고 감미롭다면 부모의 자식 사랑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아무리 분별없는 맹목(盲目)이어도 무조건적이기에 더욱 가슴이 찡하다.
성질 못된 어떤 아들이 교통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잃어버렸다. “두 눈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앙탈하는 아들에게 홀어머니는 “한 쪽 눈 기증자가 있어 수술할 수 있다”고 달래는데 애를 먹었다.
“한 쪽만은 수술 않겠다”며 떼쓰는 아들을 가까스로 다독거려 수술을 끝낸 후 여러 날 지나고 눈에 감았던 붕대를 푸는 날, 아들의 옆 침상에는 외짝 눈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얘야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불편한 너를 돌보기 위해 한 쪽밖에 줄 수 없었구나, 미안하다” 주워들은 이야기다.
간이든 콩팥이든 자식을 위해 자신의 장기(臟器)를 거리낌없이 선 듯 내줬다는 부모의 자식사랑 이야기는 하나 둘이 아니다.
제 창자를 토해내 새끼를 먹인다는 ‘펠리컨(사다새)’처럼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미의 새끼사랑 이야기는 곧잘 잔잔한 감동으로 일어선다.
이 정도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새끼사랑은 본능적이다.
그러나 사람이 더불어 사는 세상살이에서는 부모의 자식 사랑을 본능적으로만 엮어 낼 수는 없다. 처한 상황과 시대배경에 따라 그 사랑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역겹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격(格)과 향(香)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에 그렇다.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그의 차남 홍업씨의 부자(父子)간 사랑이야기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향기로운지 역겨운지의 판단은 느끼는 이들의 몫이다. 홍업씨는 4.25 국회의원 무안 신안 보궐선거에 민주당 전략공천으로 출마했다.
누구든 피선거권이 있는 한 어디서든 공직선거에 출마할 수 있고 정치활동도 할 수 있다. 홍업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홍업씨의 경우는 다른 누구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우선 그의 아버지가 전직 대통령이다. 현재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의 형이자 DJ의 장남인 홍일씨는 아버지 지역구였던 목포에서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나라종금에서 돈 받은 혐의로 형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가 지난 2월 특별사면복권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가족관계 속에 대통령아버지의 그늘에서 기업들로부터 수십억원의 뒷돈을 받아 챙긴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던 홍업씨가 아버지 후광을 업고 권력을 잡으려는 데 있다.
“권력 세습”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도 DJ는 “고생만 시켰던 자식이 명예회복 하겠다는 데 말릴 수가 없었다”고 감싸고 있다.
햇볕정책과 노벨평화상으로 빛나던 아버지에게 레임덕을 안기고 비리정권이라는 오명을 씌웠는 데도 아들에 대한 맹목적 사랑을 확인해주는 셈이다.
이에 질세라 홍업씨도 “아버지의 아들로서, 동지로서, 민주화와 정권교체에 온몸을 바쳤다”고 화답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오죽해야 광주전남지역 62개 시민사회단체에서 “자식들에게 권력 세습하면 안 된다”고 홍업씨 출마 반대를 외치고 있겠는가.
홍업씨의 낙마(落馬)보다 DJ의 낙상(落傷)을 걱정하고, 이제까지 쌓아올린 DJ의 명예가 더럽혀지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빗나간 자식 사랑과 아들의 헛된 세습권력 욕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썩 기분 좋은 사랑이야기는 아니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