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은 기쁨과 슬픔의 경위로 하여 짜가는 한 조각의 비단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기쁨으로만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으로만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것같이 보이는 사람도 흉중에는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도 기뻐서 웃을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 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하여 절망과 좌절만 할 것도 아니다. 슬픔은, 아니 슬픔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영혼을 정화하고 그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라고 성인들의 말씀은 들었지만 나 같은 믿음과 철학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와 같은 심정이다. 예수의 사랑, 석가의 자비, 공자의 인도 인간의 가슴을 덮는 검은 그림을 막을 수가 없는 것만 같다.
나의 첫째 아들은 삼십대 중반이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작년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착하게 살려는 보통 청년이다. 나의 아들이 B형 바이러스 보균자이므로 한 달에 한 번씩 회사 앞 개인 의원(내과)에서 간에 대해 초음파 검사를 받았으나 정상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일상직장 생활 하다가 소화가 안 되어 종합병원에서 검사 결과 현대의학으로는 치료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간암 말기라는 청천벼락의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 개인 병원에서 10일전에도 아들의 간은 정상이라고 진단했는데 말이다.
나는 서울 S병원에서 두 달을 같이 생활 했다. 아들과 같이 있으면서 의사의 지시대로 초약(양약이 아닌 한약)을 먹지 못하도록 권유했던 것이 나을 수 있는 타이밍을 노친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 아들과 자부(子婦)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심정이다. 질식 할 것만 같은 마음은 정말 미치기 바로 직전임이 분명했다. 아들의 고통과 좌절을 보면서 뼈를 깎는 고뇌와 싸우면서 나도 미쳐지기를 바라는 욕심 부리면서 줄담배로 시간과 싸워야 했다. 아들이 요양병원에 있을 때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주도에 내려와서 술에도 의지 해봤었다. 그러나 술은 역부족이었다 한두 시간 정신을 마취 시키는데 불과 했다.
부모님의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지괴(天崩地壞)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다는 뜻이다. 나는 부모님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 현대의학으로는 방법이 없다는 S병원의 어느 교수님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좌절과 슬픔을 주체 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지괴(天崩地壞)보다 더 한 것이다. 여러 지인들이 큰마음 먹으라고 한다. 물론 위로 할 수 있는 말은 그 말뿐이 없을 것이다.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득히 못 미침을 이제 처음으로 체험한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 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들의 창백한 얼굴을 안타까이 생각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통과 질식 할 것 같은 고뇌는 나의 죄 값으로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프로테아 나무는 씨앗이 가득 들어 있는 열매를 고스란히 품고서 계속 하늘을 보며 날벼락을 기다린다고 한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산불이 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산불의 열기에 의해서만 열매가 터지면서 씨앗을 퍼뜨려 발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벌도, 나비도, 새도 아닌 마른하늘의 벼락만 기다리는 나무의 운명, 그 낯선 좌절과 고통에 동병상련처럼 가슴이 쓰리고 아픔을 어찌 하란 말인가. 그래도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의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고귀하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신념을 다지려고 안간힘을 내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되는 고통과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 하소서”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