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그리운 동무'
[세평시평] '그리운 동무'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03.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뚝한 한라영산 우러러 보며/동무들은 목이 터지라고 승공을 외쳤다/창창한 대해수를 뒤에 다지니/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땡볕 아래서 이승만 각하를 기다렸다/자그만 가슴에도 피가 흘렀다/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동무들이 목이 터지라고 소리를 지르던 시절/베나물 동산에 살던 단짝 동무는 /누나와 함께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그곳에서 다시 북송선에 올랐다/그 누나가 북한 티브이에 자주 나온다는/믿기지 않은 소문도 들려왔다/이불 속에 숨어 북한방송을 듣던/북조선으로 떠난 동무를 불러들여/동창회 임시총회라도 소집하면 어떨까/우리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떠난 동무를 가슴에서 지우며/아들 녀석 장가보낼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다/농약 값이 너무 오른다고 밀감 값이 개 값이라고/울분을 토하며 서로 또 잔을 권하지만/멀리서 대동강은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리운 동무‘ 전반부)” 내가 쓴 시 작품(詩作品) ‘그리운 동무’의 주인공은 지금 북한에 살고 있다. 그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곳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그는 나와는 초등학교 단짝이다. 항상 어깨동무를 하고 학교에 함께 다녔으며 하학 후에도 동네에서 함께 뛰어놀았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인가, 그는 내 곁을 영영 떠나버렸다.

그는 식구들과 함께 일본으로, 일본에서 다시 북송선을 탔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함께 북송선을 탄 그의 누나가 가끔 북한방송에 나온다고 주위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그는 남쪽 동무가 애타게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묵묵부답일 따름이다. 재일동포 사회의 분단도 한반도의 분단과 역사를 같이 했다. 해방 직후 결성된 재일조선인연맹과 민단은 처음에는 대립관계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 수립 이후 민단은 한국정부를 지지하였고, 조련은 점차 일본공산당과의 관계를 강화시켜나가면서 동포사회의 분단도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 민단은 동포사회의 범대중 조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취약하였다. 그러나 점차 남한국적 동포들이 증가하면서 총련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갔다. 이때 쯤 재일동포 북송사업도 시작되었다.

1959년 12월 14일 975명으로 시작된 북송사업은 이듬해 12월 18일까지 1년 동안 5만1978명에 이르렀으며,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소강상태에 빠지다가 1967년까지 8만8천명에 달했다. 내 동무는 1959년이나 1960년경에 북송선을 탔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런 내 동무와 연락이 닿았으면 하는 것이 요즘 내 생각이다. 당시 남쪽에서 볼 때는 꼭 저지해야 할 ‘북송’이고, 일본 입장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보냈으면 하는 ‘귀환사업’이고, 북쪽 입장에서는 감격스러운 ‘귀국’이다.

이 사업으로 북으로 간 동포는 다시는 일본 땅을 밟지 못했고, 새로운 이산가족을 만들어냈다. 모두 남쪽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70만의 재일동포 사회에서 1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북으로 돌아갔다. 최근 북한 청소년축구팀의 제주 전지훈련 소식이 들려온다. 17세 이하 북한 청소년 팀이 우리 제주를 찾는다는 보도였다. 핵실험 강행 이후 중단위기에 몰렸던 북한 감귤보내기 운동도 재개된다는 소식도 있다.

하여튼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떠난 동무를 우리 땅에 불러들여/찢어진 추억도 한 겹 한 겹 꿰매고/그곳 소식도 듣고 밀감도 듬뿍 안겨주자는/누군가의 제안에 반응은 별로였다/우리는 대한의 착한 어린이/빛내자 함덕학교 우리 힘으로/멀리서 동무가 부르는 노래가 들려오고/대동강은 출렁거리며 우리를 불러대는/깊고 깊은 그런 추억의 밤이다(‘그리운 동무’ 후반부)”

김   관   후 (시인/소설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