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각설이타령이 생각난다
[데스크 칼럼] 각설이타령이 생각난다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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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화두는 경제다. 생각해보면 경제가 화두 아니었던 때가 없었다. 그렇다면 경제살리기에 정부가 한 일은 무엇인가.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국민의 소리만 더 커졌을 뿐 이다. 노 대통령의 취임초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축으로 만들어졌던 열린우리당은 속된말로 개박살났다. 그래선가. 노 대통령은 최근 탈당했다. 앞의 것은 국민우롱죄에 해당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대통령 선거에 나왔고 그래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직을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버리겠다니…. 당연히 국민우롱죄가 아닌가. 그러더니 이제는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당을 떠났다. 우리 옛 선비들의 귀거래(歸去來)에 비하면 사이비 귀거래에 불과하다. 정치란 국민의 소리를 담는 것이다. 국민의 소리가 잘못됐다면 이를 바로 잡는 게 정치다. 지금 정치는 국민의 소리는 안중에도 없다. 오히려 그 소리가 듣기 싫다고 불평만 하고 있다. 정치는 온데간데없고 권력만 있을 뿐이다.

세상풍자로 유명한 품바

상황이 이쯤되고 보니 그 옛날 각설이타령이 생각난다. 그 소리는 지금의 국민의 소리와 영락없이 닮았다. 지금 경제 밑바닥의 암울진 그늘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체념 승화 그 자체다. 우리나라 걸인문화를 대표했던 각설이타령도 바로 이 체념승화에서 자리한 또 하나의 문화였다. 이 탓 저 탓을 모두 초월, 팔자 탓으로 체념한 뒤 못 가진 것에 대한 속 편함과 그것이 낙천화(樂天化)돼 바가지를 두드려대며 불러댔던 타령. 이 각설이타령은 체념→자적(自適)→낙천→냉소(冷笑)로 과정화, 서민대중의 잠재의식에 도사린 좌절감에 잔잔한 공명(共鳴)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세상풍자로 유명했던 ‘품바’도 바로 이 각설이타령이었다.

相乘의 노래

그 각설이 타령을 한번 들어보자. “누가 나를 만들었소, 어머님이 술청에서 퇴주잔으로 만들었지. 누가 세상을 만들었소. 상제님 한눈팔다 실수로써 만들었지” 이렇게 자신과 세상을 다 체념하면 자적이 우러난다. “호달마(胡達馬) 요절(腰折)하면 왕십리에 가 분(糞)을 싣고, 화용기생(花容妓生) 늙어지면 구리개에서 탁주판다. 각설이 잘못돼야 각설이밖에 더 되겠냐. 그 아니 좋은가 품바 품바” 다음장으로 넘어가면 낙천과 해학이 우러나온다. “다 떨어진 통령갓에, 소매없느 베중치막, 안만 남은 누비저고리, 좌우 가랑이 통풍바지, 시원쿠나 시원쿠나, 저기 가는 저 양반아, 삼복에 곱삶는, 가엾은 알쌍동이” 해진 가랑이에 바람이 시원하게 드나드는 통풍바지 입고 삼복더위에 한증막 같은 양반바지 속을 가엾게 여기고 있는 대목이다. “세상 걱정 없으니 삼공육경(三公六卿) 부러울손가. 흉년걱정 없으니 천석노적(千石露積) 부러울손가. 도둑 걱정없으니 고대광실(高臺廣室) 부러울손가. 네 애비 잘 만나서 오복칠복(五福七福) 다 탔으니, 애비에게 효도하고 명당(明堂)찾아 묻을지라” 각설이가 어린 각설이에게 효도와 행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긴 손톱 검은 때꼽 앙상 꼬부랑손이지만, 홀치고 돌려치는 아전 손만큼 더러우랴, 빡빡 얽은 빈대코에 피골상접 할개눈이지만, 종년 호리고 밤에 기는 양반 상판보다 더 추하랴” 세태를 비평하는 이 시니시즘의 여유까지 묻어나는 각설이타령이야말로 이 시대에 딱 어울리는 상승(相乘)의 노래가 아닐런지…

김   용   덕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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