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초 한 모임에 갔더니 대통령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벌금으로 2차 맥주를 사야한다는 규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일부 불만가진 사람도 있었으나 통과됐다. 신년 초부터 불유쾌한 정치 이야기를 꺼내 모처럼의 ‘분위기’를 해칠 필요가 있겠냐는 합의 때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말 평통자문위에서 연단을 내리치며 작심하고 쏟아낸 연설은 ‘대통령의 발언’이 아니었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어떻게 공개 석상에서 그토록 거칠게 격정과 울분을 토로하고, 국정 운영에 대한 비판여론을 싸잡아 매도할 수 있는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막말로 쌓였던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민망하다. 대통령의 발언은 그 자체로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음을 모를 리 없는 노 대통령이 평상심을 잃은 채 거침없는 독설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컨 문제다.
연설에서 드러난 노 대통령의 현실 인식도 매우 우려스럽다.
노 대통령은 전시 작통권, 안보, 대북 금융제재 등에 대한 언급에서도 원색적인 언어의 사용을 반복하였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미 2사단 빠지면 다 죽는다고 국민이 사시나무처럼 떠는 나라’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우리 군인들이 떡 사먹었나’ ‘짜고 치는 고스톱’ 등 국민을 헐뜯거나 국방의 의무를 왜곡하거나 외교적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발언들을 국가 최고지도자가 여과 없이 그리고 서슴지 않고 토해냈다.
‘노무현이 하는 것 반대하면 다 정의라는 것 아니냐’ ‘흔들어라 이거지. 흔들어라 난데없이 굴러 들어 온 놈’에서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 정도면 오만과 독선, 편협과 아집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 장면이 TV를 통해 안방에 그대로 흘러나오자 같이 TV를 함께 보던 중. 고교 생 자녀에게 민망하기도 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요즘엔 대통령4년 임기 중임 헌법을 고친다고 난리다. 물론 단임제의 잘못된 점을 전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하필 엄동설한 민생문제에 신경 써도 모자랄 판에 웬 개헌 이야기인가. 정치판을 확 뒤집어 임기말기 통치누수가 벌어져 여당조차 자기를 기피하고 대통령 말을 우습게 아는 정치권을 그의 주도대로 정국의 흐름을 끌고 가겠다는 정치적 의도임을 모르는 백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교수신문이 2007년 한국사회의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로 반구저기(‘反求諸己)’를 꼽았다. ‘反求諸己’는 ‘孟子’ 공손추 편에 나오는 글귀로서 원문에는 “發而不中, 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로 나온다. ‘활을 쏘아서 적중하지 않아도 나를 이기는 자를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서 자기에서 (잘못을) 찾을 따름이다’라고 해석되는 문장이다.
바로 노 대통령은 물론 자신의 허물은 감춘 채 남의 탓만 하는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 아닐까.
서민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젊은이들이 직장을 얻지 못해 자아를 상실해 가고 있다. 가정이 파괴되고, 중소기업이 파산하고 있으며 남남갈등, 빈부의 양극화, 부동산정책의 실패 등으로 이념적, 경제적 분절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노대통령이 평소 추구하는 이상주의 정치, 교과서적 민주주의 실현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치는 곧 현실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에 함축되어 있는 정치공학의 논리를 떠나서 국민이 걱정이다. 민생을 뒤로하고 언제까지 정치게임만을 하고 있을 것인가.
지금 대통령이 할 일은 국민에게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심어주는 일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나의 역사와 지식을 반영한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임 창 준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