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처럼 정겨운 호칭이 또 있을까. 친할머니든 외할머니든, 할머니는 그저 손주들을 귀여워해주는 내리사랑의 상징이기에 더욱 정이 넘친다. 그러나 한다하는 문필가와 명사들이 ‘어머니’를 칭송하는 글은 많이 다루면서도, 할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쓰질 않는다. 할머니와 더불어 지낸 추억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과문한 노릇인지 모를 일이다. 이도 저도 축에 끼지 못하는 보통사람이 할머니와 관련한 글을 쓰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보았다. 유년기와 청소년시절을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결혼 후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지금 생존해 계셨으면 1백10세, 19세기와 20세기를 사시다 가신 분이다. 워낙 구시대 여성이다 보니 글은 한글자도 익히지 못한, 그야말로 일자무식의 어른이셨다. 그렇지만 바로 그 할머니가 국어 겮置?영어겧갭츃화학, 이른바 신학문을 공부하는 손자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며 잘 키워주셨다. 할머니의 훈육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심오하다. “짐이 이김이여”가 특히 잊혀 지질 않는다. 어렸을 적에는 누구나 그랬듯이 밖에 나가 놀다 번번이 친구와 싸움질을 한다. 형뻘 되는 아이들한테 덤벼들다가 얻어맞아 울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언제나 조용히 타이르는 할머니의 말씀이 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다. 그저 참고 한 걸음 뒤물러서면 될 것을.” 꾸지람이 아닌, 부드러운 음성이었기에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도, 제 아껴주는 것은 안다.” 지금도 할머니의 또 다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농촌에는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다. 그 돼지들이 냄새나는 거름통에서 사육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할머니께서는 더러운 돼지의 머리를 곧잘 쓰다듬어 주곤 하였다. 아무리 미물(微物)이라도 자기 보살펴주는 것은 알게 마련이라면서. 마치 보답이라도 하려는 양, 우리 집 돼지들은 새끼를 꼭 12마리 이상을 낳아 가게(家計)에 보탬을 주었다. 제주인 들의 덕목 가운데 하나가 절약이다. 할머니께서도 여느 제주사람 못지않게 ‘조냥’하셨다. 아니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그런 노인이다. “몸뻬(일본 여성들의 노동용 바지)고름을 늘 조여 매면서 살아야 한다.” 배불리 먹지 말고 약간은 곯은 듯, 바지 끈을 항상 동여매며 지내라는 말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 마을에는 대학 진학생이 1년에 한두 명 있을 정도였다. 다른 마을도 비슷한 형편이었겠지만, 그만큼 시골의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도 아닌 손자를 서울 소재 대학까지 보냈으니, 얼마나 근면 절약했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할머니의 가르침은 계속된다. 연로하신 할머니께서 한시도 쉬지 않고 밭일과 집안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이라도 질라치면 “그 어려운 대학공부도 하는데, 이 할미가 하는 일은 익숙한 것이어서 아무렇지도 않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열심히 해서 ‘큰 사람’이 되어라.” 60여 평생을 사는 동안, 할머니께서 소망하시던 그 ‘큰 사람’이 되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이 아직껏 괴롭기만 하다. 흔히 이 고장에 원로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굳이 저명한 인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할머니와 같이 우직하면서도 깊이 있는 훈도(薰陶)를 할 수 있는 어른들은 얼마든지 계시지 않겠는가. 인재는 저절로 태어 난다기 보다는, 주변에서 만들어 내는 일이 옳을 터이다. 우리가 찾아내고 떠받들며 머리 숙여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드는 탓인가. 돌아가신지 25년이나 되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이상하리만치 짙어지는 요즘이다. “짐이 이김이여.”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