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집단 관음증 유발
도대체 어떤 외설(猥褻)이기에 대한민국 최고 권부의 상징인 청와대가 발끈 일어섰고 그리하여 사회적 집단 관음증(觀淫症)을 일으키고 있는가.
최근 청와대와 국정홍보처가 '문화일보'에 연재중인 소설 '강안남자'의 선정성(煽情性)을 이유로 이 신문 100여부를 구독 중단하면서 제기되는 의문이다.
겉으로는 "청와대 여직원들이 포르노 사이트를 보는 것과 같은 '강안남자'를 사무실에서 더 이상 보기 부끄럽다"며 절독(切讀)을 건의해서 내린 조치라고 했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되레 이 신문의 "권부 비판 논조에 대한 반격이며 비판 언론에 대한 제갈 물리기나 통제의 수단으로 '구독 중단'이라는 유치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청와대 여직원들의 절독 건의 이유가 오히려 엽기적인 외설이며 이를 받아들인 청와대 '왕의 남자들'의 협량(狹量)과 용열(庸劣)이 더욱 외설적 만행이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와대의 구독 거절이후 구독 신청 부수가 더 늘어나고 이 신문 홈페이지는 접속폭주 현상이 계속되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 될 것인가. 청와대가 앞장서 '강안남자'를 선전해준 꼴이다.
이런 이유로 '강안남자'가 청와대 '왕의 남자들'을 굴복시켰다고 세상이 비웃고 있다면 참으로 해괴하고 부끄럽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끄러운 권력 남용 놀음
물론 종합 일간지가 갖고 있는 넓은 독자층과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선정성 짙은 외설물이 연재되는 것은 신문의 위상과 품격에 맞지 않다. 언론의 공적기능을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신문 소설의 선정성 여부는 충분한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입장에 따라 비판과 비난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의 잣대로 재단할 일이 아니다. 독자의 다양한 가치판단이나 '문화 스펀지 영역'에서 빨아들이거나 짜낼 일이다.
그러기에 지난 5년간 연재할 때는 아무소리 하지 않다가 비판적 논조 이후 갑자기 선정성을 이유로 절독을 선언한 청와대 '왕의 남자들'의 숨은 의도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 신문은 하루 36면 발행이다. 소설 '강안 남자'는 그 36면 중 한 면의 코너에 배치된다.
그래서 '절독 건의' 이유가 외설에 있었다면 얄궂게도 청와대 여직원들은 그 동안 36면 중 한 면의 코너에 배치돼 있는 에로틱한 부끄러운 외설물인 '강안 남자'를 열심히 찾아서, 그리고 은밀하게 읽어왔다는 고백이 아니던가. 여간 문제 풀기 어려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읽어보지 않고는 소설의 외설이나 선정성을 판단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지 않고 청와대가 선정성을 이유로 치사하게 여직원까지 동원하여 '비판언론 사냥'에 나서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참으로 비겁한 권력 남용놀음이 아닐 수 없다.
언론 존재 이유는 '권력비판'
언론의 존재이유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에 있다. 이것이 한 정권보다, 국익과 국민을 위한 언론의 사명이다.
따라서 비판 기능이 없는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전제 왕권 시대에도 '비판 언론'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호와 격려의 대상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나오는 조선시대 사관(史官)이나 언관(言官)만 봐도 그렇다.
왕의 면전에서 잘못을 깨우쳐 왕의 뜻을 꺾이게 하는 면절(面折), 뜰에서 소리쳐 잘못을 바로잡는 정쟁(庭諍), 여기에 더해 궁궐의 난간을 부러뜨리면서까지 간언하는 절함(折檻)을 해도 면책특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언론의 자유가 모든 자유를 가능케 한다'는 이 대명천지(大明天地)에 권력의 주먹으로 언론을 때리고 '개혁과 도덕성'으로 위장된 증오의 이빨로 비판언론을 씹어버린다면 백성은 어디에서 자유를 찾고 어떻게 자유를 노래할 수 있을 것인가.
"현명한 정부는 결코 언론을 조종하는 법이 없고 현명한 기자는 결코 정부를 예찬하는 법이 없다"
뉴욕타임스의 논객이었던 '제임스 레스턴'의 말은 그래서 권력과 언론 양쪽 모두가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경구나 다름없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