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곳 소련으로 이주한 조선인 역사는 1880년대 우리나라 개화기때 부터이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수탈을 피하여 만주를 거쳐 이곳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줄잡아 소련에 이주한 고려인(이하 카레스키)은 53만. 그러나 1937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두달간 스탈린 정권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연해주 일대 우리 동포를 일본인의 밀정이 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를 붙여 무작정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백키스탄 등 동토의 땅으로 내몰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23만 강제이주민 가운데 4만명이 아사 또는 동사하는 비극을 겪었다고 한다. 비극은 이로써 그친게 아니라 1991년 소련이 몰락하자 공산 통치에서 벗어난 CIS 독립국가들은 자기 종족이 아닌 카레스키를 못살게 굴고 폭행하는 바람에 이들은 다시 첫 번 이주지역인 연해주 일대 나호카나 우스리스크 등 작은 도시나 농촌으로 되돌아 왔으나 살길이 막막한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연해주로 돌아온 4만여명의 귀향인들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내란으로 인한 혼란을 황급히 피하느라 국적증명 등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보따리 한 두 개만 달랑들고 몸만 빠져 나왔기 때문에 만여명 정도가 자녀를 취학시킬 수도 없고, 취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땅한 집도 없어서 군인들이 쓰던 허름한 막사(APT)에 거처를 정했지만 수도나 전기료를 부담할 수 없어 모두 거리로 쫓겨나서 유랑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 러시아 정부나 한국에서 다소의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마저도 끊어져가는 형편이어서 카레스키들은 사망률은 늘고 출산율도 줄어들고 의욕도 줄어드는 형편이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이처럼 연해주 일대 경제적 환경이 열악한 가운데 이유종 종무원장이 농장 진출의 원대한 프로그램을 들고 이곳에 와서 펼치어 놓게 된 것이다. 이 지역 농장 안내책임을 맡은 이동명씨는 앞으로 이미 임대 완료한 9개 농장 말고 3개 농장을 추가로 더 임대해서 향후 10여년간 12개 농장을 모두 정비, 개량, 보수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려면 수 백억원의 투자가 필요하지만 이 사업이 일단 정리되면 이 지역은 우리 국가의 미래 식량 창고 역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생산된 콩은 특수 제분과정을 거쳐 한국으로 공급될 것이고 메주용 콩과 두부, 간장 역시 이 지역 콩을 이용해서 제품화하고 한국등지로 판로를 개척할 것이라고 한다. 이씨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의 콩 소비량은 160만톤인데 국내생산은 고작 17만톤에 머물러 연해주 농장의 콩과 옥수수 등의 소비시장은 이미 확보된 셈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까 연해주 일대는 산이 거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지평선만 보일뿐이었다. 여행마지막 무렵, 블라디보스토크로 올때까지 우리는 산없는 평원만 달리다 돌아온 셈이다. 산에서 해뜨고 계곡이나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고 살아온 우리에게 지평선에서 뜨고 지는 평원의 장대한 아름다움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을까 또 한가지 연해주 일대의 수로는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후 집단 농장 개설때 수백 수천 km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건설해 놓았기 때문에 조금만 손보면 되는 것이고 전기만 있으면 이 지역 평원의 물 공급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홍 석 표 (제주산업정보대학 복지행정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