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생각하는 계절인 것 같다. 여인만 가을을 타는 것일까? 남자도 가을이 되면 허전하고 무엇인가를 다 써버린 것 같은 마음은 가을마음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계절의 변화에 언제나 삶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다. 봄에는 들꽃과 함께 피어나는 생명을, 여름에는 성숙한 여인의 몸매처럼 절정에 다다른 신록의 싱그러움을, 가을에는 황금빛 들판의 풍요로움을, 겨울에는 함박눈의 펼쳐주는 하얀 비경(秘境)을 노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대자연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고독과 절망을 견디며 죽음이라는 종점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느 시인은 인생이란 ‘촛불이 타서 최종 마지막 남은 부분까지 가면 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들 인간만이 안고 있는 불행이다. 물론 이 불행의식과의 싸움이 삶의 바람직한 방향이겠지만, 그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막지 못할 때가 가을인 것 같다. 특히 늦가을은 그런 슬픈 상념의 계절이기 때문이리라. 오곡을 탐스럽게 맺게 해주는 가을, 생명을 완성시키는 가을은 프랑스의 문인 보들레르가 시를 읊었듯이 우리를 곧 차디찬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도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씩 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나뭇잎들을 삶의 비애나 죽음과 동일시하는 것은 진부하리만큼 되풀이되어온 메타포(metaphor)이다. 세계적인 문인들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한 잎의 낙엽에서 노인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찾고, 죽음의 슬픔과 피안(彼岸)의 세계를 접한다. 그러나 잠시 우수(憂愁)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겨울은 삶의 종점이며 가을은 그 종점에 이르는 여행의 마지막여정(旅程)이라고 느끼고 이 느낌과 낙엽을 맞물리게 하는 관례적인 이미지들을 잠시 거부 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낙엽을 다시 나무를 성장시키는 것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낙엽은 영영 죽는 것일까? 아니다. 그 죽음은 외양뿐이다. 그것은 더욱 더 성숙하도록 하는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나무 밑에서 고이 썩어서 거름이 되고 새봄에는 초록색의 생명의 잎을 수북하게 탄생 시킬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불가에서 말하는 자신의 ‘해탈’이다. 그래서 가을의 나뭇잎은 낙엽이 되어야 한다. 깨끗이 떨어져야 할 가을이 왔는데도 끝끝내 가지에 매달려 있으려는 고엽(枯葉)은 잎으로서의 해탈을 못하는 것이다. 생성(生成)의 순리를 어기려는 그런 철없는 고엽을 보면 그것을 따줘야 한다. ‘그대는 죽어서도 산다. 아니 죽어야 다시 산다’고 타이르면서 말이다. 낙엽을 주제로 삼으면서도 죽음을 넘어서는 이런 상향적인 시나 노래는 없을까? 앞서 인용한 보들레르의 시구처럼 영원한 죽음인 겨울로 이르는 과정으로서 가을을 생각하는 대신에 중생(衆生)에서 해탈(解脫)로 이어지는 시나 노래는 없는 것일까? 그런 노래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수 이영희가 부른 ‘가을타는 여자’라는 가요가 있다. 성숙한 연인의 들으면 좋은 노래이다. 가슴 타는 날에 잠 못 들고, 이리저리 뒤척인 것은/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그리움으로/ 가을타는 여자인가 봐/ 모든 것이 채워져도 빈 것 같은 허전함이여/ 빨간 단풍잎 떨어진 길을/ 추억을 밟으며 걸을 때/ 치맛자락 맴도는 한줄기 바람에도/ 가을은 아픔만 있구나. 이 노래를 들으며 잠 못 이루는 가을밤을 지새는 이들도 성숙과 소망을 기원하는 생명으로서 겸허하게 가을밤을 보내기 위하여 애썼으리라. 가을이 깊은 상념 속으로 우리를 가라앉히는 계절임을 누가 부인하랴. 그러나 이 깊은 상념이, 우리들 속에 언제나 잠재해 있고 때로는 염세가치관으로 고독과 싸우는 노인들이 자살로 이어지는 계절이다. 이럴 때 낙엽을 종교적인 해탈과정으로 인식이 가능하다면 가을은 더욱더 알차고 밝은 계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