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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老婆)는 여든 여덟 살이라 했다. 이 할머니는 미수(米壽) 나이답지 않게 세상 물정에 밝았다. 할머니는 아마 어느 결혼 예식장엘 다녀오는 듯 했다. “쯧쯧, 요즘엔 신랑 외에 부신랑(副新郞)이라는 게 있더구나. 만약 신랑이 유고(有故)라도 한다면 그 부신랑이 남편 역할을 대행하라는 얘기 아닌가. 패륜이야 패륜”. 나이도 잊은 듯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오뉘끼리도 결혼하는 모양이야. 신부가 신랑에게 오빠오빠 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신랑이 신부의 오빠라면 그 신부는 신랑의 누이 아닌가. 해괴하고도 망측해라”. “젊은이들 옷 입는 모습도 우스워. 내가 노망 끼가 들어서 그런지 멀쩡한 새 바지 무릎께에 일부러 가위질을 해서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참으로 민망해. 그 정도도 좋지. 무릎이 다 해어진 바지를 비싼 값에 사다가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돈이 아까워. 며느리의 무릎 터진 바지를 보고 너무 가여워 새 바지를 사다 준 어느 시어머니가 있다던데 너무 순진해. 아니 딸의 무릎 터진 바지를 뭣 모른 어머니가 바느질로 정성껏 꿰매 주었더니 다시는 그런 헌 바지를 사 오지 않더라는 얘기도 들었어”. “또 기가 막힐 일은 제 자식에게 ‘이 개새끼야’하고 욕설을 퍼붓는 부모도 있더구나. 제 자식이 개새끼면 자기는 무엇인가. 그런 욕지거리를 아버지가 했다면 그는 수캐요, 어머니가 했다면 그는 암캐지 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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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여성들의 노출증(露出症)과 호주제도 폐지에도 한마디씩 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여성들의 노출증이 너무 심해. 특히 한여름이면 가관(可觀)이야. 하반신에는 팬티인지 치마인지 모를, 무슨 미니스커튼가 하는 것을 입고 상반신에는 유방은 아슬아슬하게 가렸지만 가슴을 열어 젖히고 양어깨가 온통 드러난 옷을 걸친 채 거리를 쏘다니고 있으니 원....어디 그뿐인가. 심지어 배꼽까지 드러내 놓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차림이 성추행의 간접원인(間接遠因)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참 모를 일이지”. “호주제도 폐지는 왜 해. 그게 남녀 불평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면 호주제를 아예 없앨 것이 아니라 제도를 약간만 고쳐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을 말일세. 호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면 할머니가 호주 상속하고, 호주할머니가 돌아가면 그 아들이, 또 그 아들이 돌아가면 그 며느리가 호주가 되도록 하면 될게 아닌가. 옛날에도 호주인 남편이 돌아가자 부인이 호주 상속한 예가 있었거든? 나도 들었는데 외국의 학자들 중에는 한국의 호주제도야 말로 세계에서 가장 본받을만한 가족제도라고 하더군. 호주제를 살리되 여자도 호주가 되도록 했다면 남녀 불평등이 한층 더 해소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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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미수(米壽) 노파의 문화비평을 들으면서 반론거리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마땅한 반론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반론은커녕 도리어 고개를 끄덕여졌다. 10대, 20대 청장년 여러분. 아니 10대 청소년 여러분. 88세의 이 할머니 얘기가 어떠하오. 옳은 얘기 같소, 그른 얘기 같소. 혹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앞으로 할머니의 말 뜻을 참고해서 행동할 일이요, 그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마음대로 하시오. 다만 어느 쪽을 택하든 국가와 사회와 자신을 위해서 향유하는 문화는 건전할수록 좋고, 지녀야할 인륜-도덕은 퇴폐하지 말아야 하오. 이 점을 명심하기 바라오.
김 경 호 (상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