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관포지교(管鮑之交)
[세평시평] 관포지교(管鮑之交)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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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관중 포숙이 가난한 때의 사귐을 보지 아니했는가? 이 우정의 도리를 요즘 사람은 흙같이 버리도다”(두보) -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는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이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다정한 친구 사이였다. 가난 속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도 그들의 우정에는 틈이 나지 않았다. 뒤에 제상이 된 관중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아이다.” 모든 세속적인 이해관계나 경제적 이익을 초월하는 참된 우정이 관포지교이다.

그런데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이것을 인용하여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을 냉소적으로 한탄하고 있다. 진정한 우정의 도리를 흙같이 팽개치는 경박한 세태 - 1200여년 전의 표현이고 먼 나라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파헤친 것처럼 들리는 것은 지나친 억측 때문일까? 이 세상에는 친구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참으로 우정은 소멸되어 가고 있을까? “수많은 인구가 분주히 돌아가는 대도시는 고독한 은둔자들이 살고 있는 현대의 사막이다”라고 신랄하게 꼬집은 사람이 있다. 풍요로운 물질과 기계의 편리주의가 이루어 주는 생활은 자기중심적 독단과 결부되면서 인간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아파트라는 커다란 콘크리트 상자 안에 갇혀 살아간다. 매일 매일의 분주한 활동과 텔레비전, 컴퓨터 같은 기계들이 가족 간의 따뜻한 교류마저 가로막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들은 달팽이 껍질 속으로 들어가듯 지기 위주로, 자기 이익으로만 파고들어간다. 이웃과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친구가 없고 더욱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한스럽고 불쌍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친구가 없는 삶이란 증인이 없는 죽음과 같다.”는 격언이 생겨났으리라.

그러나 인간의 고귀한 생명력은 이웃과 더불어 친화를 이루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대자연이 베푸는 본성적인 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생명으로 여지껏 소중한 벗들과 함께 살아왔다. 우리가 그들에게 지고 있는 빚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들은 우리를 인생의 따뜻한 자리로 인도하였고, 기쁠 때나 괴로울 때에 같이 있었으며, 고독할 대 우리를 감싸 주었다. 무언가 슬픈 일이 있을 때 편안한 자리에 눕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자리, 고귀한 향가가 가득히 떠도는 자리가 있었다.

그것은 깊고도 그윽한 우리들의 우정이 머무는 인생의 동산이었다. 우정의 값은 저울에 달아 볼 수도 없고, 용광로에서 제련해낼 수도 없다. 진실로 우정은 천국이며 우정이 결여는 지옥이다. 우정은 삶이며 우정의 결여는 죽음이다. 진정한 친구는 생명을 이어 주는 약이 된다. 그것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다. 우리는 그 친구들을 온도계로 삼아 우리 운명의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 따뜻한 삶의 온도에서 동료를 대신할 만한 것은 아무데도 없다. 그래서 우정은 두 개의 육체 안에 성숙하는 하나의 혼이라고 말한 철인이 있다. 오늘의 삶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들어도 우리의 친구는 햇살 같은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의 생명을 지킬 것이다. 친구에 대한 우정을 최고의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만큼 신비로운 조화와 섭리가 또 있을 것인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신약성경)

김   영   환 (전 오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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