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데"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왕이자 뛰어난 조각가였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상아에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완성된 여인상은 너무 아름답고 우아했다. 피그말리온은 그만 자기가 조각한 여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여인상이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고 이에 감동한 여신(女神) 아프로디테는 여인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들이 결혼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는 여기서 비롯됐다. “지극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지성감천(至誠感天)’도 여기에 속할 터이다. 이와는 반대로 “안 된다 안 된다”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뜻의 ‘역(逆) 피그말리온 효과’도 있다. 피그말리온 사랑의 기적은 영의 세계나 신의 영역에서만 이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도 이론적 바탕을 갖고 있다.
세상 변화시키는 '긍정의 힘'
심리적 범주나 교육적 측면에서 긍정적 생각을 갖고 강하게 소원을 빌거나 믿음을 갖는다면 소원이 성취되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것이 피그말리온 효과다. 저명한 뇌 생리학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에릭 칸델’박사는 “긍정적 사고를 자주 경험하면 신경세포의 구조가 개체의 잠재 능력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변화한다”는 이론을 내 놓은 바 있다. ‘뇌가 정신을 지배한다기보다 정신이 뇌를 지배한다’는 논지다. 피그말리온 효과의 이론적 뒷받침이나 다름없다. 사실 그렇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좌절보다는 응전을, 부정보다는 긍정적 시각으로 세상을 엮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믿어 최선을 다한다면 세상은 좀더 건강하고 밝아질 것임에 틀림없다. 최근 미국의 차세대 리더로 급부상하는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도 그의 베스트 셀러 ‘긍정의 힘(원제;your best life now)’에서 “긍정적 사고가 개인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상적인 신뢰사회에서의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담론이다.
마네킹에 쏟았던 '햇볕정책'
여기서 뜬금없이, 그리고 장황하게 피그말리온 효과나 긍정적 사고의 힘을 끄집어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전혀 예측불허의 비정상 국가의 ‘막가파 식 행태’의 역설적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긍정적 사고’나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한 너무나도 엄청난 반동적 상황이 실질을 압도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북핵(北核) 사태가 그것이다. 북의 핵실험 강행은 피그말리온 효과나 ‘긍정적 사고’ 이론을 일거에 뒤엎어 버린 절망적 패러독스나 다름없다. 갖다 바쳤던, 퍼 주었던, 지난 1995년부터 2006년까지 12년간 대북 지원금액이 6조5899억원이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결국은 우리가 북핵 개발을 꾸준히 지원해왔던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햇볕 정책은 아무리 햇볕을 쪼여도 외투를 벗을 수 없는 마네킹에 햇볕을 쏟아 부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민족끼리’라는 둥지에 무정란을 품고 무한정 병아리로 부화되기만을 기다렸던 무모한 짝사랑은 아니었던가. 그 동안 우리가 그렇게 소원했던 남북화해와 민족공조, 그리고 짝사랑 같은 햇볕정책이 ‘뭐 주고 뺨맞는 식’의 ‘핵 주먹’으로 돌아왔다면 누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 이것은 분명 ‘대북 짝사랑의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참으로 참담하고 답답하고 막막할 따름이다. 그러나 절망은 이르다. 아직도 ‘피그말리온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평화를 위한 간절한 소망을 갖고 산다면, 그래서 ‘긍정의 힘’을 긍정한다면 위기의 현실을 헤쳐나갈 희망은 어디에서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도 짝사랑에 취한 국가지도자의 ‘착시현상’이나 ‘나 홀로 연정’에 연연하는 무모함에 있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