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칼럼] 유감은 무슨 유감
[김경호 칼럼] 유감은 무슨 유감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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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든 고의든, 잘못을 저지른 대부분의 정치인들이나 고위공직자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국회 혹은 시민단체나 국민들로부터 ‘사과’ 요구를 받는다. 이 요구에 대해 그들은 좀처럼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가능한 한 피해가려고 애쓴다. 결국 여론이 들끓고 사태가 더 악화돼서야 마지못해 ‘사과의 장(場)’을 마련한다.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변명 반, 해명 반을 늘어놓은 다음에야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한마디한다. 이상한 것은 사과를 요구한 측도 유감 표명으로 만족해버린다. 사과와 유감은 천양지차(天壤之差)로서 정반대의 표현임에도 말이다. 유감은 ‘섭섭하면서 언짢게 여기는 마음의 감정’이다. 사과는 ‘자기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함’이다. 따라서 유감 표명은 사과를 받아야 할 쪽이 해야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유감 표명이 아니라 반드시 사과를 표명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바라는데도 거꾸로 유감을 표시하는 것은 주객(主客)의 전도(顚倒)다. 몇 해 전 일이지만 일본 천황이 우리에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한 적이 있었다. 36년간의 식민 통치에 대해서였다.

그는 일제(日帝) 만행에 대해 “통석지염(痛惜之念)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그게 무슨 사과냐”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일본 천황을 닮아서일까. 큰 잘못을 저지른 우리의 정치인들이나 고위 공직자들도 사과라는 말에 매우 인색하다. 그 대신 유감표명으로 할 도리를 다한 것처럼 치부해버린다. 그래서인지, 서귀포 시장에서 당인(黨人)으로 자리를 옮긴 강상주 한나라당 제주도당 위원장의 최근 사과가 돋보인다.

그는 5.31지방선거 금품공천과 관련, “제주 도민들에게 많은 걱정을 끼쳐드려 깊이 사과한다”고 말했다. 정직하고 진솔한 이 사과 한마디로 강상주 위원장이나 한나라당은 신뢰가 떨어진 게 아니라 도리어 회복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공사(公私) 간에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개연성을 갖고 있다. 일단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그에 대한 사과는 추(醜)함이 아니다.

도리어 사과의 진실성과 감도(感度)에 따라서는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과는 잘못을 상쇄할 수도, 반전시킬 수도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법조삼륜(法曹三輪) 말실수 이후 국민들이 관심을 보인 것도 사과 여부였다. 그러나 이용훈 대법원장은 26일 서울고법과 중앙지법 방문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사과나 유감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거친 말을 함부로 해 말실수를 한 것을 인정하면서 “검찰이나 변호사가 상처를 입었다면 절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점도 해명했다.

 한마디로 이날 대법원장의 발언 대부분은 법조 삼륜 간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 대한 해명과 공판중심주의-구술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사실 이용훈 대법원장의 입장에서는 이번 논란에 대해 꼭 사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을 것이다. 설사 정제되지 않은, 품격이 낮은 언어를 구사했지만 그것은 법원 내부 문제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말실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말실수 자체가 거두절미(去頭截尾) 된 채 전달돼 오해의 소지를 안겨 준 측면도 배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26일의 해명으로 검찰과 변호사 측에서는 만족하지 못하나마 사과한 것으로 간주, 수용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대법원장이 사과 대신 유감이란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이미 검찰과 변협 쪽에서 대법원장에게 ‘유감’이라고 말한 마당에 다시 대법원장이 그 쪽에 유감이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유감’이라는 말의 정체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논쟁 쌍방이 모두 상대방에게 유감이라고 한다면 정말 유감스러운 말이 된다. 이번의 법조삼륜 싸움을 지켜 본 필자는 누구의 잘 잘못을 떠나 대법원장이 이왕 말실수를 인정한 바에 “거친 말을 함부로 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한다”고 한마디만 덧붙여 주었다면 사태를 해결하는 데 명약(名藥)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그로 인해 이용훈 대법원장의 인물됨도 한층 돋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들이나 고위공직자들은 앞으로 사과할 사안에 대해 유감이란 표현으로 언어를 농(弄)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국가 지도자들이 있을 때는 국민들도 “유감은 무슨 유감. 정직하게 사과하라”고 크게 질책할 필요가 있다.

김   경  호 (상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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