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웅이라기보다 ‘구국의 영웅들’이다. 앞다퉈 전쟁터에 나섰지만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데 한 마음이었다. 더구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이었음에야. 오로지 민족 최대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구국일념으로 불타올랐던 제주도 청년과 학도병, 교사들로 주축을 이뤘던 해병 3·4기생 3천명. 들고 있던 ‘펜과 분필’을 총으로 바꿔 출정한 해병대 기상과 불굴의 정신은 국난극복을 기원하는 강렬한 횃불로 타올랐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유민주주의 수호, 민족평화통일의 의지로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다. 1950년 9월 1일에 제주항 산지부두를 떠나 9월 15일 18시 30분,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한·미 해병대합동 ‘인천상륙작전’에 임한 제주도 해병 3·4기생들은 ‘견습수병’ 계급장을 달고 9·18 수도 서울탈환, 그 환희와 감격의 선봉에 섰다. 해병 3·4기생들이 투입되어 혁혁한 전공을 거둔 1951년 6월, 도솔산 전투에 이승만 대통령은 ‘無敵海兵’이라는 휘호를 내렸다.(그 이전인 1950년 8월 17일,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에서는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을 부여받기도 했다.) 원산, 고성, 동양리, 함흥 검살령 등지는 물론 펀치볼 김일성고지, 모택동 고지, 장단 및 사천강 지구 전투 등에서 승리를 이끈 주역들로 기록되고 있다.
생존해 있는 해병 3·4기 ‘구국의 영웅들’은 이제 70대 중반 전후의 노해병으로서 원로 해병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전쟁이 안겨준 상처로 고생하다가 병사한 분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56년전, 제주지역사회에는 4·3의 회오리가 아직 진정되지 않은 시기였다. 10代 童顔의 중학생들이, 그들을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제주 청장년들까지 혈서로써 자원입대에 임했다. 학생과 선생님들은 “나라가 있어야 배움터가 있고, 진리탐구를 하는 학도도 있다.”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 사제지간, 형제가 동시에, 친구들끼리 해병대 입대 행렬을 이루었다.
그뿐인가. 중학교 3학년 이상의 여학생과 여교사들까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126명이 입대했다. 해병대 최초 여군의 탄생이었다.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전체인구 중에 70% 이상을 점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안보의식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남북평화통일을 원하면서도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군입영 기피는 물론 통일을 원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도 있다. 일본이나 대만보다 우리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 구하겠다는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맥아더 동상을 훼절하고 철거 행위에 나서는 것이 애국이 아니다. 역사적 기념물이지 않은가. 마치 우상 숭배의 대상인 양 치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설령 부끄러운 역사기록이라 하더라도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제주도에 남겨진 일제 잔재, 전적지들마저 우리는 없애지 않으려 하고 있다. 역사적인 교훈과 함께 나라사랑, 공동체의식을 키워주는 소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열린 인천상륙작전 제56주년 기념식에 제주도의 해병 3·4기 노병들은 기꺼이 자비로 참석했다고 한다. 입대 당시의 우국충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가적·지역적 지원이 너무나 빈약하기만 한 현실이다. 그러한 지원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말씀들을 하신다. 아무리 그래도 도리가 아니다. 해병 3·4기는 물론 육·해·공군으로 입대하여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구국의 용사들과 유족들에 대한 예우는 반드시 필요한 일 아니던가. 또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참전용사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분들의 우국충정에 보답해야 옳다고 본다. 9월 22일, ‘제주특별자치도 해병대의 날’ 기념식이 열린다. 해병 3·4기를 이은 해병 전우들이 제주도에 참 많다. 자원입대가 많았던 점도 해병대의 전통일 것이다. 4면이 바다여서만이 아니다. 해상활동이 왕성했던 탐라국의 후예임이 잘 드러나는 현상이라 하겠다. 팔각모와 빨간 명찰,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참으로 빛나 보인다.
안 창 흡 (민주언론시민연합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