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추원보본(追遠報本)
[세평시평] 추원보본(追遠報本)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에게 영광을, 조상에게 존경을”(솔론) 자기의 가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다. 이러한 본능이 실천으로 옮겨지면서 인간은 선한 생각과 행위를 하게 된다. 가정에서 생명을 누리는 인간은 자기 가족사의 나무(족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나무의 가지를 오르내리면서 조상과 후손을 만난다.

천금의 보석은 이익으로 인연이 맺어져 있지만, 조상과 후손은 자연의 힘으로 맺어졌다. 이익으로 맺어진 것은 위급하면 버리지만, 자연의 힘으로 맺어진 것은 위급하면 거둬들인다. 조상에게 존경을 드리는 일은 참으로 자연의 힘에서 비롯되는 생명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추원보본”이라고 하면 좀 고루하고 진부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질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칭송하는 조상들의 생생한 면을 땅 속에 묻어 둔 채, 과거의 이름에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소극적 태도라는 게 그 이유이다. 진취적인 추진력을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추억에 잠기는 것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나날이 경쟁에 쫓기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퇴영적인 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비생명적 요인들의 억압을 당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추원보본은 더욱 필요한 덕행이 아닐까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 이 땅에서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새삼 뿌듯이 절감할 것이다.

추원보본을 실천하는 행동의 하나로 우리는 조상의 묘소를 돌아보고 정성스레 성묘를 한다. 우리 고장에는 음력 8월 1일을 전후하여 조상의 묘소를 성묘하는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져 왔다. 1년에 거의 한 번 조상의 묘지가 꽃밭이 되고, 성묘로 땀을 흘리는 후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현대의 다양한 생활 패턴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친족들이 조상의 은덕 안에서 만나는 자리이다.

기계문명의 홍수에 흘러가면서 고유의 풍습들도 많이 변형되거나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친족이 모여 조상의 묘소를 성묘하는 관습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은 좋은 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시금 조상에 대한 존경심을 다져나아가리라 마음먹는다. 묘소는 본래 사람의 삶이 남긴 자취이며 생애의 종착이다.

우리의 우호적인 자세 앞에서 무덤은 인생의 고귀함에 대해 소근거려 주기도 하고, 더욱 참되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엄숙이 깨우쳐 주기도 한다. 우리가 조상의 무덤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그런데 아주 일부이기는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우리를 슬프게 한다.

허영에 들떠 2억원짜리 수입코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처럼 행동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넓은 면적의 땅에 조상의 묘소를 아방궁처럼 호화롭게 꾸미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국토를 마구 잠식하다가는 끝내 전국토가 무덤으로 뒤덮힐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마이동풍이다. 호화 분묘가 조상에게 영광을 드리는 게 아니다. 단지 그것을 꾸민 이의 무분별한 허영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비단 호화 분묘가 아니라도 묘지 문화를 시대의 추세에 따라 개선해 나아가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자연의 힘으로 맺어져 위급할 때 거둬들여야 하는 우리 조상들의 넋은 호화 분묘가 아니라 우리의 정성과 사랑 속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묘지 문화는 개선되어 나아가야 하지만 그것이 조상 숭배를 결단코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두겹 조상”(한국 속담)이 아니라도 조상은 우리의 존경 대상이다.

김   영   환 (전 오현고 교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