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벌초를 다녀왔다. 제주시 오라동을 거쳐 애월읍 새별오름에서 한림읍 상대리까지 조상들 산소를 휭돌며 풀을 벤다는 게 쉬운 노릇은 아니다. 10여년전까지만 해도 이틀 족히 걸리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통팔달 길이 좋아지고 자가용에 벌초기계까지 갖추고 있으니 한나절이면 묘소 여섯 자리쯤 벌초하기 어렵지 않다. 제주 사람치고 벌초의 어려움(?)을 겪지 않는 가정은 없을 터이다. 추석을 앞둔 9월만 되면 벌초 걱정이 마음을 짓누른다. 제주지방은 예로부터 추석전에 조상묘를 깨끗이 다듬고 추석 명절을 지내는 풍습이, 명절 당일 묘소를 찾아 성묘하는 다른 지방과 달랐다. 그만큼 조상 섬기는 일에 지극정성이었다고 해야 옳다.
매장 중심의 장묘문화
사실 벌초하는 풍습은 매장 중심의 장묘문화가 가져온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조상 섬기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하는 효도의 한 형태로 좋은 땅을 택해 매장을 하고 정성껏 보살피는 장묘 문화를 가지고 있다. 요즘은 공동묘지에 갈 수밖에 없어 풍수지리를 따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이것도 조상에 대한 예의요, 더 나아가서는 자손의 발복을 비는 기복신앙의 일종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매장 중심의 장묘문화가 가진 폐해는 적지 않다. 우리로서는 당장 벌초의 부담이 크다. 예전처럼 자손이나 많고 친척들이 가까이에 모여 산다면 모르겠으되 지금처럼 출산율이 낮아 자손이 귀하고 서울이나 미국 등 외지에 나가 사는 경우가 많은 시대에는 조상묘를 다듬는 일은 큰 부담이요 고역이 아닐수 없다. 또 무덤으로 인한 국토 잠식도 문제다. 전국적으로는 해마다 여의도의 몇 배가 되는 국토가 무덤으로 변해 ‘묘지강산’이 되고 있다 하며, 더구나 좁은 섬인 제주지방은 늘어나는 무덤으로 한해에 경작지가 제주종합경기장의 두배 이상 잠식되고 있는 실정이라니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벌초 문제의 경우 최근에는 농협같은 데서 ‘대행’해 주는가 하면 벌초 대행업까지 등장해 돈만주면 쉽게 벌초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남한테 맡겨하는 벌초에 지하에 계신 조상님들 마음이 편하겠는가. 벌초는 조상에 대한 사랑이요 정성이 아닌가. 사랑과 정성이 없는 벌초는 그야말로 엎드려 절받기나 다름없다. 상가나 장례식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자로 弔(弔喪할 ‘조’)자가 있다. 이 글자는 사람 ‘인(人)’자와 활‘궁(弓)’자가 합해진 것으로, 사람이 활을 들고 짐승을 쫓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이를 두고 고대 중국에서는 시신을 풀로 덮고 장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늑대와 같은 짐승이 부모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활을 들고 시신을 지킨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랑했던 이의 주검에 대한 우리 선인들의 경외심이 돈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례 바꿔 무거운 짐 벗자
그런데 조상들의 유택(幽宅)인 무덤에 벌초조차 제대로 않는다면 시신을 짐승에게 내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행인 것은 최근들어 장묘문화에 일대 변혁이 일어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도내에서도 상례의 절반 가까이가 화장으로 바뀌고 있다는 통계도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같은 시민운동이 전개되면서 화장률도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산소에 묻혀있던 유골을 수습, 화장한 다음 납골하는 일도 많아진 모양이다. 최근 제주시 양지공원에는 이 같은 유골 화장신청자가 줄을 섰다고 하니 이장 방식도 화장이 보편화 되는것 같다. 화장중심으로 장묘문화가 바뀌는 큰 원인으로 ‘벌초’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죽음을 성스럽고 정중하게 맞이하고 있으며 그들을 기억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원하며 다양한 장묘문화가 만들어져 왔다. 매장을 하든 화장을 하던 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도 장묘 문화를 바꾸고 벌초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김 원 민 (편집국장/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