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 자체가 분명히 우리들의 결말이다. 사는 것이 우리들의 법칙이며 희열이다.”(사로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진통이듯 이 영원한 아픔을 거쳐 우주는 우리들의 것이 된다. 그래서 태어나는 일은 신성한 것이다. 신의 탄생을 경배하는 모든 인간의 출생이 바로 축복을 받는 날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가슴을 맞대고 숨을 모을 때마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의 신비가 전해 온다. 이 신비를 지속적으로 감지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이 믿음 안에서 내가 어머니 몸을 통해 태어나던 순간을 묵상한다.
그 시간 그 곳에는 촛불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찬란한 태양을 내놓듯이 어둠 속에서 나를 내놓아 꺼지지 않은 생명이게 했다. 생명의 탄생은 사랑이다.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어머니의 몸에서 절실한 사랑은 시작된다. 그것은 끊이지 않고 지속된다.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삶의 한 복판을 살아간다. 이러한 생명을 낳고 지속시키는 일이 어찌 축복 받을 일이 아니겠는가? 생일 축하의 인사는 사실 그 어머니에게 드려져야 마땅한 것이리라. 근래에 이르러 자식 낳기를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어서 우려의 소리를 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보다 물질적 풍요가 더욱 중요하다고 우리는 세뇌되어 버렸는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60년대 “잘 살아 보세”와 더불어 우리를 세뇌시킨 주문같은 구호들이다. 잘 살아가려면, 아니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려면 자식을 좀 적게 낳으라는 주문이었다. 잘 먹고 잘 사는 데 가장 큰 장애요인이 자식들이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민망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로부터 근 30년 동안 우리는 생명의 탄생이 사랑의 근원이며 기쁨과 희망을 주는 것임을 망각하고 말았다.
오히려 새로운 생명이 경제적 고통과 압박을 주는 원인으로 인식되도록 길들여져 왔다. 이 시기에 우리는 애를 못 낳게 할 수 있는 모든 지략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아이를 하나, 최대한 둘만 낳은 사람이 유능하고 개화된 사람, 셋 이상을 낳으면 미개인이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출산 제한 운동은 상당히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 저출산 문제는 지극히 우려할 만한 사태로 대두되었다.
2005년 통계에 의하면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출산율이 가장 낮다고 한다. 합계출산율 1.08은 선진국의 대체출산율 2.1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이 사태가 지속된다면 수년 후에는 경제활동을 하는 소수의 젊은이가 대다수 노년층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더욱 우려할 일은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나라의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종국에는 대한민국, 한민족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국가 존망에 대한 가상이다. 소득의 증대는 사람들을 물질만능에 도취되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지극히 찰나적인 쾌락주의에 빠져들어 조그마한 고통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는 그냥 배척된다. 자식을 낳는 일보다 돈을 벌고 즐기는 일이 중요하며, 생명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장식품에도 없다. 이제 우리는 출산 장려를 주문처럼 외치기보다 생명의 주체로서 생명에 대한 경탄과 아울러 그것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생명을 낳는 아픔과 생명을 키우는 수고를 뿌듯한 희열로 체득해야 할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그 부모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대잔연의 섭리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김 영 환 (전 오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