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으로 살고 싶어한 영원한 보히미언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한 영원한 보히미언
  • 김원민 논설위원
  • 승인 2006.0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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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김택화 형의 영전에-

택화 형.
이렇게 홀연히 떠나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월요일 아침, 형의 부음을 접하고는 청천벽력같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만, 너무나 갑작스런 형의 비보를 듣고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개인전 때 뵈었을 때만 해도 건강하신 것 같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겠습니까?

오랜 세월 제주풍광에 천착

형과 저의 인연은 제가 홍익대에 입학하면서 시작됐지요. 어느 날 노고산 자락 산길을 따라 학교 가는 길에 우연찮게 형과 조우했던 거 기억나나요? 형은 고향 후배가 당신 이후 처음 홍대에 입학했으니 이제는 외롭지 않겠다며 환하게 웃었지요.
 그 후 형은 우리 교실에 들러 제 석고 데생을 봐 주곤 했었지요? 형은 홍대에서 유명했습니다. 석고 데생을 가장 잘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언제나 동료나 후배들의 리더의 자리를 지켰으니까요. 사실 당시만 해도 제주에는 석고상이란 게 없었으므로 석고 데생이란 꿈도 못 꿨던 시절 아닙니까? 저도 입학시험을 앞두고서야 두어 달 정도 서울 동숭동의 옛 서울미대 앞에 있던 김병기 선생 화실에서 석고 데생을 배우는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저에게 형은 얼마나 큰 의지와 도움이 됐는지  모릅니다. 학교에서 아침에 석고 데생 지우개용으로 나오던 따끈따끈한 식빵 냄새는 지금도 제 후각을  자극하는 듯 합니다만, 그것은 형의 체취와 함께 제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택화 형.
형은 이미 대학시절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특선을 하고 ‘오리진’ 이라는 비구상 그룹을 창립해 의욕적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그 오리진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멤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한국의 ‘젊은 미술’을 이끌고 있으니 형의 선견지명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은 비구상보다는 제주풍광에 심취한 나머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형은 ‘오리진’을 중심으로 비구상 회화운동의 기수로 나서기도 했고, 한때는 인물이나 정물을 즐겨 그리기도 했지만 1970년대 이후 제주의 풍광에 천착해 왔습니다. 한라산, 오름, 초가, 포구, 해녀 등 제주의 풍광은 형의 그림 속에서 하나하나 살아 숨쉬었습니다. 형의 화면에 재현된 제주의 자연은 형에게 있어서는 있었던 그대로의 제주요, 우리에게 있어서는 있는 그대로의 제주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를 경험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제주 섬의 얼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의 그림에서는 향토적 감정이 강조되고 섬사람들의 감각적 전통이 존중되었으며, 특히 형은 자신의 눈을 지방적 풍물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형의 그림들은 자연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보다는, 도리어 그것들에서 제주 사람들의 한과 고단한 삶 같은 인간적인 것을 소박하고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택화 형.
형은 신성여고와 제주대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힘 기울이기도 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그림에만 몰두한 전업 작가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형은 제주대학에 미술교육과가 신설될 때 그 산파역을 하다시피 했는데도 결과적으로 전임교수가 될 수 없었던 데 대해 한때 몹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기본' 중시했던 원칙주의자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전업 작가로서 가장 제주도적인 작품을 빚어내라는 하느님의 엄숙한 명령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또한 형은 언제나 원칙에 충실한 원칙주의자였습니다. 실생활에서는 자신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삶을 살아가기도 했으며, 또 그것은 그림에서 더욱 엄격하게 드러났습니다.
비구상을 하더라도 데생에서부터 완성까지 사실적인 그림의 바탕이 없으면 허구라는 원칙을 지켰던 것입니다. 기본이 돼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택화 형.
형은 차라리 제주의 자연 속을 떠다니는 보히미언 이었습니다. 어디에 속하기보다는 보히미언과 같이 자유스럽게 살고 싶어한 영원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생애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관 뚜껑을 닫아봐야 그 가치를 안다 고도 했습니다. 이제야말로 형의 생애와 작품들이 그 가치를 말할 때라 하겠습니다.
베토벤은 임종 때에 “갈채를 보내주게 벗들이여! 희극은 끝났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만, 베토벤처럼 박수를 요구받을 것도 없이 형의 일생에 경외심을 담아 박수를 보냅니다.
잘 가십시오. 이 세상 살 때 멍에처럼 짊어지고 있던 그 많은 수고들일랑은 모두 훌훌 털어 버리고 영면하십시오.

김   원   민 (편집국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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