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제주마 질병의 증상(症狀)과 진단(診斷) 및 치료(治療)
[56] 제주마 질병의 증상(症狀)과 진단(診斷) 및 치료(治療)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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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房星(별자리: 天馬駟星) 별을 일명 '馬祖'라 일컬음

탐라국 초기부터 대자연의 변이는 곧 인간에게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들 자연계의 현상으로 사람 또는 국가의 길흉(吉凶)을 점치게 되었다. 사람의 질병 뿐 아니라 가축의 질병도 자연의 이변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일자(日者) 또는 일관부( 日官部)라는 관청이 있었다. 고려 때에도 일관(日官)이 있어서 가축의 질병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인종 20년(1142년) 서남부지방에 소, 말의 질병이 대유행 했을 때 일관을 파견하여 그 종식을 빌었다는 기록이다.         
특히 말과 관련이 있는 천체(天體)는 방성(房星:天馬駟星)이다. 이 별은 일명 “馬祖”라고도 하며, 말의 조상으로서 말에 관한 모든 일을 좌우하는 별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말의 질병(疾病)의 치유(治癒)를 위하여 이별에 제사를 올리는 일도 고려시대에 시작되었다. 이것을 마조제(馬祖祭)라 하며, 제사를 올리기 위해 만든 단을 마조단(馬祖壇)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도 전근대적 습속인 무주(巫呪)와 복술적(卜術的)  방법이 사회생활 모든 부분에서 많은 영향을 가운데 수위 부문에 있어서 가축질병의 대유행 때는 물론 질병의 예방과 치료 방법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하는 것과 거의 같은 미신적 방법이 국가기관이나 개인적으로 공공연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수의술(獸醫術)의 계승발전과 독자적인 경험방이 상당히 발전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수·당의 대륙적 수의술도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고려로서는 원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말에 있어서는 그들이 기마민족(騎馬民族)이었기에 중국보다도 더더욱 발전된 수의술을 축적하고 있었을 것이며 약 100년을 지배하면서 우리나라 마의학(馬醫學) 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고려 충렬왕2년 (1276) 제주도에다 160필의 말을 운반하여  탐라목마장인 동서아막을 개설한 후 약 2만 여필이  도입되어 번식된  탐라 말을 원(元) 태복시(太僕寺)가 취하였다는 몇 개의 기록이 있다.  단지 우리조상들이 오랑캐에게 짓밟혔다는 울분 때문에  마의 질병 치료에 대한을 남기지 않은 것뿐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마정(馬政) 에 관한 업무의 관장은 병조(兵曹)의 사복시(司僕寺)에서 담당한 것은 물론 수의(獸醫)가 사복시에 전속되어 말의 질병치료를 담당하였던 관계로 그 명칭을 마의(馬醫)라고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사복시에 마의(馬醫) 10인이 있고 종육품(從六品)에서 종구품(從九品)까지이다 (종육품  安驥 1員, 종칠품  調驥 1員, 종팔품  理驥 1員, 종구품  保驥 1員).
세종9년 세자(世子)가 대호군 윤 중부와 사직 황 보신 등과 진헌마 50필, 사복다인마 25필, 타운마 24필 등을 거느리고 명나라로 떠날 때 마의(馬醫)·양마(養馬)와 종인(從人)을 대동하였다. 세종 13년 이조에서 “아뢰기를 제주 사람은 의술(醫術)이 정밀하지 못하여 3읍의 병든 사람을 구료하기 어렵고, 또 교유(敎諭)는 1주년 뒤에 사고가 없으면 체임시키므로, 바닷길에 오고가는 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벼슬을 받은 지 3, 4개월 후에야 부임하게 되어, 7, 8개월 동안 훈도의 임무를 다하기란 어렵습니다. 원컨대 수령과 교수관의 예에 의하여 30개월이 차거든 체임하기를 허락하고, 마의방(馬醫方)도 별도로 가르치고, 검률(檢律)의 체임 기한과 율문(律文)의 교회(敎誨)의 교유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말의 병의 치료를 위해 체아직(遞兒職)을 두고 마의방(馬醫方) 등을 전습케 하였다.
세조 6년에는 졸(卒)한 본도 출신 참판(參判) 고 득종, 고(故)한 마의(馬醫)김남 등과 양마(養馬) 윤 길부 등도  원종 3등 공신(原從三等功臣)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12년에는 충추부 동지사 서 거정에게 마의서(馬醫書)를 편찬하게 하였다.
성종 25년에 소는 밭갈이하는데 알맞고, 말은 타는데 알맞으므로 모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데, 지금 우마(牛馬)의 병을 치료하는 자들이 모두 천박(淺薄)한 소견의 처방을 쓰고, 옛 것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능히 치료하지 못하여 혹은 그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마땅히 안기집(安驥集:중국에서 전하는 의학책, 3권. 모든 병마다 각각 그림이 있고, 약방이 있음)을 속히 번역하여 우마(牛馬)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특히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과 숭명배청사상로 인한 정주학(程朱學)의 영향으로 기술과 실학에 대한 천시의 풍조는 더욱 심하여 이에 관한 학문과 기술이 전문적으로 발전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다만 출세한 정치가나 이름 있는 인문계의 학자들이 직무상의 관심 또는 부차적인 취향에 따라 수의나 축산에 관한 학문적인 노력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 학자나 정치가들은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전문적인 수의학자도 아니고 더욱이 기술자라고도 할 수 없지만 그와 같은 학문적 노력과 업적이 그 나름대로 공헌을 하였고, 수의학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 그 자체가 곧 수의학자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말의 질병에 관하여 발간된 전문서적으로는 신편집성마의방 이외 상마경(相馬經),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 마의방(馬醫方), 원형마료집(元亨馬療集), 마경초(馬經抄) 등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마경초집언해만은 한문에다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특징적인 것으로는 원형마료집은 청나라 사람이 쓴 것이고 나머지는 조선조 광해군과 인조 때에 발간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모두 당시의 사복시 제조였던 이서(李曙)의 영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서(李曙)는 조선시대의 수의학에 있어서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마경언해의 서문을 장유(張維)가 썼는데 이 내용을 보면 이서의 말에 관한 사랑을 읽을 수 있다. “국가의 구목의 정사는 모두 사복시에서 총괄하는데 李曙가 제조(提調)가 되어 말의 병이란 고치기 어려운데도 마의부문 학술이 어두운 것을 염려하여 [마경(馬經)] 네권을 간행하고 또 요긴한 뜻을 모아서 언어로 풀이하여 판각(板刻)하여 널리 펴서, 하인들까지 다 처방을 살펴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마음을 환하게 하였으며, 예전 마정에 관해서는 주예(周禮)보다 상세한 것이 없었는데, 이미 교인(交人), 목사(牧師), 유인(庾人) 등 벼슬을 두어 그 일을 나누어 다스리고 또 무마(巫馬)가 있어 병든 말을 요양하는 일을 맡아 마의(馬醫)를 도와서 약으로 병을 고쳤다. 대저 말을 고치는데 의자와 무자를 아울러 쓰기까지 하였다.
신해참포침의마경대전도 이서가 쓴 수의학서적이다. 이 역시 중국에서 마경4권을 구해다가 춘하추동(春夏秋冬) 4권을 최명길(崔嗚吉)의 발문(拔文)으로 간행한 것인데 이를 좀더 개정 수정보완 한 것이 마경초집과 언해일 것이다.
그 외 마의방이라는 이름으로 2권이 전해지는데 그 하나는 광해군 8년(1616)에 의주부에서 간행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조11년(1633) 제주에서 발간한 필사본이며, 그 외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말에 관한 서적으로는 정확한 년대나 발행자를 모르는 국한문 혼용의 “마경”이라는 목판본과 “馬經抄”라는 한문으로 된 자료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57)제주마 질병의 증상과 진단 및 치료Ⅱ에서 계속)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제주마문화연구소장/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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