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제주마 낙인(烙印)의 자형(字型)
[52] 제주마 낙인(烙印)의 자형(字型)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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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5년 國ㆍ私馬의 씨수마 대퇴부에 父자 낙인 찍어 외부반출 엄격

제주목마장(10所場과 字목장)과 개인목장의 말 소유 표식인 낙인(烙印)의 자형(字型)과 숫자 및 도형은 조선시대 태종 15년(1433)때 國·私馬의 씨수마(種馬) 대퇴부(넓적다리:잠지)에 부(父)자 낙인을 찍어 외부반출을 엄히 규정하였다.
세종15년 사복제조가 제주에서 좋은 말을 찾아서 번식에 대해 아뢰기를 공·사(公·私)간 목장들에 품질 좋은 씨수마(種馬)는 부(父)라는 낙인을 찍어서 육지로 나가는 것을 허락지 아니함은 이미 전에 입법하였으나, 개인목장에서는 그 본인이 뒷생각을 하지 않고 모두 다 팔아 내보내니, 그 육지로 나갈 때에 만일 부(父)라는 낙인이 찍힌 말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언제나 개인목장에서 육지로 내어보낼 때마다 제주의 각관원이 그 모색과 말 주인의 성명을 기록하여서 감사에게 보고하면, 감사가 하륙하는 곳의 수령으로 하여금 상고해 살피게 하도록 하였다.
예조원년(1469)에는 제주의 상인(商人)이 산 말은, 절제사가 교역문권을 상고해서 시자인(市字印)을 낙인(烙印)하고 모든 포구의 감고들이 시자(市字)의 유무를 고찰하여 육지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니 말 매매가 개인에게도  가능케 하였다.
성종3년에는 제주도로부터 낙인이 없는 말을 가지고 이르는 자가 있으면, 제읍(諸邑), 제역인(諸驛人)이 잡아 고발하여 궁추하기를 허락하고, 인하여 그 말로써 상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주국마목장인 10소장 내에 다시 자(字)목장의 마필은 천자문(千字文)의 순서인 天·地·玄·黃·宇 등 58자(남환박물의 63자장)를 정하여 사(私)목장(개인목장)은 이 문자사용을 금지하였다.
숙종20년(1694)때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에는 10월에 일소(一所 )와 별둔의 양장(兩場)의 구자(九字) 낙인을 찍은 말이 1060여필, 흑우 280여 마리, 그 다음날에는 낙인을 확인하였다.
2소장에는 육자(六字)로 낙인한 말이 700여필, 제3소장에는 팔자(八字) 낙인한 말이 1100여필을 하루 종일 낙인(烙印)을 점검하였고, 제4소장에는 십 삼자(十三字)로 한 말이 1200여필, 제주목에 소속된 동장(東場) 4소(所)는 두 군데로 나누어 별방(구좌읍 하도리)과 조천의 소(所)로 몰고 내려오게 하고, 서장(西場)의 4소도 명월과 애월의 두 소(所)로 몰고 내려오게 하여 낙인(烙印)을 하거나 점검하였다.
그리고 1~2세 망아지는 낙인표시가 없으므로 개인목장과 복잡하게 섞이면 목자들이 농간할 염려가 있으니 낙인(烙印)을 아니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호점하고 놓아 보내는데 반달(半月)이 소요되는 일이나 이 일을 나흘에 마쳤다고 한다. 또한 5월에 관덕정(點烙三邑歲貢馬於觀德亭)에서 3읍(三邑) 세공마의 낙인을 확인하였다.
“숙종30년(1704)남환박물의 탐라계록초에 3읍 목장 63둔(屯)속에 제주목 36개 글자, 정의현 17개 글자, 대정현 5개 글자로 낙인하여 말 숫자는 제주목에는 현(玄)자 말이 40필, 노(露)자 말이 30필, 측자 말이 40필, 상(霜)자말이 42필, 천(天)자 말이 15필, 지(地)자 말이 16필, 주(宙)자 말이 13필과 정의현은 개(芥)자 말이43필, 함자 말이 43필, 인(鱗)자 말이 37필, 잠(潛)자 말이13필이니 어찌 가히 마장(馬場)이라고 말 하겠습니까?
말이 50필 이상이면 둔(屯)을 지울 수 있으나, 40필 이하는 어렵습니다. 하물며 10필 이하는 어린이 놀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동마색(同色馬) 처리과정에서 죽은 말 가죽에 낙인(烙印) 표시가 없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고종15년 때 제주세공마 200필은 마종(馬名)이 赤多斜看者雄馬 禾五(모색이 밤색, 流星이 비스듬히 내려온 수말 5세:적다말 간전이, 오수매, 웅매)로 되어 있으나 낙인(烙印)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위 사항을 종합해보면 제주마의 낙인 자형은 국마(國馬)의 천자문, 숫자 등을 암말, 씨수말(父)과 개인목장의 말(조선후기 목자가 고실마 보충을 위한 매매서)에 표시된 것과 표시가 되지 않은 말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강점기 때도 제주마는 방목을 주로 하기 때문에 소유자가 한 눈에 판별될 수 있도록 대퇴부(왼쪽 넓적다리)에 낙인(烙印)을 찍었는데  마을별 또는 마을에서도 각 소유자별로 구분하여 낙인을 사용하므로 가계(家系)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광복 후에는 마을단위·씨족단위 또는 개인이 문자나 도형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마을 단위로는 上加(세로로 한 글자), 下加(애월읍 상·하가리 마을), 田(애월읍 장전리 마을), 月(애월읍 애월리 마을), 씨족단위는 乃(내:경주 김씨가 남원읍 의귀리), 水(제주 고씨가 제주시 봉개동), 丁(애월읍 어음리 정씨가), 개인은 土(남원읍 남원리 양00) 五(남원읍 남원리 장00), 3(애월읍 납읍리 김00), 化(구좌읍 하도리 양00) 등 개인별로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乃 낙인은 김만일 후손이 1990년까지 사용했으나 최근에 분실되었다고 한다(김만일의 15대손 김00. 남원읍 의귀리).
 
예를 들면, 같은 烙印으로 10~15사람의 말에 사용이 가능했던 것은 뒷다리의 왼쪽과 오른쪽의 선택, 귀표가 없는 말, 한쪽 귀를 짼 말과 두 귀를 짼 말, 짼 귀를 위쪽으로 자르는 개수 등에 따라 말 소유가 다르게 표시된 것이라고 한다. 즉,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 아들들이 같은 낙인을 사용할 수가 있다.

(1) 형식과 위치
 
낙인(烙印)의 유형은 쇠꼬챙이 끝에 한 글자나 두 글자로 되어있다.
 ① 획이 많은 낙인을 사용하면 상처치유가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망아지에게 고통과 성장에 지장 및 멀리서 식별이 곤란하여 간편한 글자를 사용한 예가 많다.
 ②같은 마을에서 살면서도 씨족 파(派)별로 낙인을 사용한 예는 남제주군 표선읍 성읍리의 담낭밭 강씨는 才(재)자를, 큰 밭 강씨는 丁(정), 乙(을)을 사용했다고 한다.

(2) 시기와 장소

조선시대에는 수처(水處)가 있는 가까운 곳에 말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사장(蛇場)을 만들어 말들이 한 마리씩 통과하도록 하면서 낙인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제5소장인 경우 주연지(珠蓮池)와 장통밭: 제주경마공원 북쪽).
2수(首)인 말(2수매)을 대상으로 봄(청명전후)나 가을(음력)에 쥐날(자일:子), 호랑이날(인일:寅), 개날(술일:戌)이 좋다고 하나 가장 좋은 날은 무인일(戊寅)이라고 하여 이날 목장마다 목이 좁고 면적이 넓지 않은 곳으로 돌담이 높게 쌓여진 장소를 선택하여 4인이 한 조가 되어 말을 단단히 묶고 낙인을 찍었다. 이런 곳을 장통밭, 말통밭이라 부른다.

(3) 코사(낙인제)

낙인할 말이 많은 집에서 낙인하는 날 하루 전에 메(산디쌀밥:밭벼로 지은 쌀밥), 구운 생선 한 마리, 술 한 되 등 코시 음식을 준비한다.
제사는 낙인을 찍을 말에 걸릴 밧줄을 원형으로 사려서(정돈하여) 그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메 한 낭푸니(양푼)에 수저를 꽂아 지낸 후 주위에 코시를 하고 나서  4인이 1조가 되어 낙인을 시작한다.
 
밭 밟는 날에는 집집마다 낙인(烙印)할 때와 같이 코시를 한 후에 밭을 밟는다.
제주도에서 말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관에서 마조제(음력 이월),  말을 사육하는 사람들은 낙인제(음력 삼월), 밭 밟는 제(음력 오월), 백중제(음력 7월14일 밤) 등 1년에 4번 제사를 지냈다.
((53)제주마의 성장과 특징 및 혈통등록에서 계속)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제주마문화연구소장/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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