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요즘 많이 듣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전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정치활동을 할 때 등산을 다니면서 마음을 비웠다고 해서 그날 각 신문에 톱기사로 난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람은 나이를 들수록 마음을 비워야 마음이 편해지고 더불어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오늘 같이 여유 있는 날이면 마음을 비우는 생각에 사로잡혀지는 것도 나이 탓이겠지 하고 마음을 달래본다.
우리들 사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저승으로의 여행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의 요즘 내면세계는 단 하루도 머무르는 일이 없고, 늘 떠나는 자의 허허로움 같은 것이 맴돌고 있다. 촛불을 켜면 불이 꺼질 때 까지 타는 것과 같이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도 나는 때로는 쓸데없는 집착과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 인한 번뇌가 고개를 쳐드는 때가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전 김영삼 대통령이 등산을 다니면서 마음을 비웠다고 하듯이 나도 가끔 등산이나 여행을 다니면서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여행은 부단한 삶의 상실의 연습이고, 마음을 비우는 과정이라고 한다. 온갖 애착을 끊는 과정… 그래서 심지어는 <죽는 연습>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정말로 한라산 대피소까지 올라가 보면 그동안 무슨 쓸데없는 고민이 그렇게 많았을까, 지겨웠던 일이 무어 그리도 많았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리고는 “그래! 건강과 가족만 단단히 지키되, 부질없는 욕심들은 잘라버리자”라는 독백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또 산 아래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제주 앞바다와 제주의 오름이 주는 감흥을 받으며, 탄생과 죽음의 의미도 되새겨 보기도하고…
그래서 간혹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과의 대화를 할 필요가 있나 보다. 낮은 데 있을 때는 안 보이던 것이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때 보이는 희열, 비본질적인 것들에 얽매여 살다가, 삶의 본질의 얼굴을 새삼 발견하게 될 때의 편안함, 바로 그런 데에 등산 , 여행의 미학이 있나보다.
요즘 나는 삶이라는 것은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견디어 내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할 때가 많다. 그 견뎌냄에도 한계가 찾아와, 어느 소주방에라도 혼자 가서 소주방 아주머니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제까지 살면서 억장이 무너졌던 삶의 추억을 말하면서 울고 싶을 때가 있다. 하루하루 고단한 여정에서 무언가 따뜻한 위안이 필요 할 때, 실타래 얽히듯이 하던 일이 꼬여, 절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우리들은 어디에서 구원을 차아야 하느냐하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막힌 벽이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가파른 절벽뿐일 때, 우리가 찾아 갈수 있는 여백은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는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구하고 싶어진다. 반드시 神이라는 절대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순응에서 얻어지는 고통이 자연스러운 치유를 믿고 싶어 질 때, 여행이나, 등산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면 삶의 맛이 달라질 것만 같다.
나이가 인생종점을 향해 거의 다가온 사람들이라면, 살아가면서 돈을 벌기보다는 등산이나 여행으로 얻어지는 경험과 깨달음을 얻는 것이 났지 않을까? 삶의 상실의 과정과 마음을 비우는 연습이 여행이나 등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짐은 가벼워야 한다. 비우는, 버리는, 잃어버리는 길에서 까지 화려한 장비와 화려한 고급 생활을 하기 위한 무거운 짐을 챙길 필요는 없다. 검소와 겸허가 마음을 비우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등산이나 여행길에는 세상을 볼 수 있는 마음과 눈만 있으면 그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결국 흘흘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돌아갈 우리의 마지막 모습처럼 홀가분하게 움직이는 것도 마음의 위안과 매력일 테니까…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