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에 1948년 꽃피는 봄날에/누가 명령한 총탄에/양민은/10만이나/쓰러졌는가//저들은/ 인공 때문이라고 인공 때문이라고/40년 오늘까지 우려먹고 있지만/그것은 40년간의 속임수/40년 전 양민을 쏘라고 명령한 자는/누구인가/미국이다 미국/제국 아메리카라네”
시인 김명식의 서사시 ‘유채꽃 한 아름 안아 들고’의 일부분이다. 전후 제주땅에 침략해 들어온 미국에 영합한 이승만은 제주땅을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점령정책에 반대하는 양민들을 무참하게도 총으로, 칼로, 고문과 사격연습으로 살해하고 농락했다고, 시인은 써내려 가고 있다. 제주도는 피의 바다, 처형도가 되었고 한라산 허리 이 오름 저 오름, 해변가 백사장에는 양민과 피와 해골로 무덤을 이루었다고, 절규하고 있다.
4·3은 왜 일어났는가. 그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입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군정은 당시 통치 주체이자 권력 담당자였고, 또 민간인 대량학살을 가져온 강경 진압과 초토화 작전을 입안하였으며, 작전권을 쥐고 있었다. 미군정이 서서히 탄압의 고삐를 쥐어 가는 와중에. 4·3의 도화선인 3·1시위가 발생하였다. 1947년 3월 1일, 연인원 10만 여명이 참가하여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촉구하는 3·1독립운동기념대회를 마친 군중은 시가행진을 감행하였고, 이를 미군정이 저지하였다. 군중은 “미군은 이 땅에서 당장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이를 돌파하였다. 군중들이 거의 해산했을 때, 한 소년이 기마 경관의 발굽에 치이는 소동에 이어진 발포는 위협사격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났다. 6명이 피살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최근 ‘미국의 양심’이며, 언어학자이자 정치비평가인 노암 촘스키 역시, “끔찍한 비극에 대해 미국이 많은 책임이 있으며, 미국 대통령이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메시지 내용을 발표, 우리를 들뜨게 하였다. 여기에는 ‘제주4.3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과 ‘미국 대통령이 입장을 표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의 측근 가운데 누가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매우 쉽게 잊는다”고 미 정부와 권력의 속성을 비판하였다. 진보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공식 입장 표명은, 한국전쟁 전문가로 알려진 시카고대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의 인사로,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임이 분명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그러나/우리는 보고 쏘았지만/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학살은 그렇게 시작됐다/그 날/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살포하고/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 시인 이산하의 ‘한라산’의 일부분이다. 군사정권 시절, 제주출신 김봉현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읽고 시인은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던 제주 양민학살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로 걷잡을 수 없는 의로운 분노에 휩싸인다. “이걸 시로 쓰면 어떻겠냐?”는 주위의 위험한 제의를 시인은 기꺼이 수락한다. 1987년 3월 사회과학 무크 ‘녹두서평’ 창간호에 그 시가 수록된다. 나라가 발칵 뒤집혔고, 이어 공안당국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시인 김명식이 우리의 기슴을 향한 슬픈 노래가 계속 메아리치는 4월이다, 지금은. “그리고 서문통 향교집 돌무지 소나무 아래/그 천막 속에서/포승줄에 묶여 끌려갔던/사람들은 그대여/어디로 보냈는갚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