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컴플렉스
선거의 컴플렉스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4.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마음에 드는 말이 하나 있다. 이런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간혹 자기 자신에게는 덧없이 관대하면서, 승리를 위해서는 남에 대하여 괴팍할 정도로 가혹한 것을 스스로 발견 할 수 있다. ”
조금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상대방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일들이 허다 한 것 같다. 선거 시 더욱 그런 것 같다.
내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나 자신도 지금 이 순간 망설여진다. 아무리 경쟁시대지만 사회는 지는 사람이 있도록 되어 있다. 복싱선수가 링 위에 올라서서 싸워도 꼭 한 사람은 지게 되어 있다. 상대방을 꼭 이기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공격적이고 비굴한 수단 방법 등을 동원하여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아니다. 물론 승리자가 그 헤게모니 파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이다. 그러나 승리까지의 준비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야 한다. 우리 인간은 동물 세계의 양육 강식의 질서로 사는 동물의 세계와는 다르게 살도록 자연의 섭리는 인간에게만 문화라는 특권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비를,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힌두교에서는 희생을 초동물적인 힘으로  인간사회를 밝게 하는 것이 아닌가.
투쟁의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쥐의 경주(rat race)’ 라는 말이 있다. 길다란 튜브식 통로 한쪽 끝에 음식을 조금 두고 입구로 여러 마리 쥐를 들여보낸다.
그러면 쥐들은 서로 치고 받고, 밟고 밟히며 먼저 음식(hegemony)을 차지하기 위해 미친 듯이 찍찍대며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서로 밟고 밟히며 선거승리의 헤게모니를 차지하려고 발버둥치며 진행되는 모습이 우리사회의 선거의 모습과 사뭇 닮았다. 선량한 유권자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기회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치고, 서슴없이 경쟁자를 짓밟고 헤게모니를 차지하는 것이 ‘능력’으로 평가되는 우리 사회의 한 구석의 삶의 경쟁에서, 선하고 옳고 곧게 사는 사람들이 경쟁에 지고 도태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에 케이블 TV-PCM방송에서 지능 장애 청소년들이 육상경기 프로그램이 있었다. 달리기 경주에서 수십 명의 선수가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 했다. 얼마 안가 두 명의 소년이 단연 선두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벌였다.
그때 갑자기 그 중 한명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그의 경쟁자는 뛰기를 멈추고  돌아서서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그 사이 뒤쫓아오던 다른 선수들이 앞질러 경주를 끝냈고 , 넘어졌던 이들 둘은 서로 어께동무를 하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맨 꼴찌로 들어 왔다. 물론 경주에서는 졌지만은 인간의 삶에서는 금메달의 승리자였다. 우리 사회의 선거도 이런 인간승리의 경기는 될 수 없을 것인가 하는 덧없는 생각을 해본다.
시민 단체에서 과거의 전력(前歷)을 토대로 낙선 운동을 펼쳐도 기필코 당선하겠다고 목숨전쟁을 벌린다. 이런 사회에서 선거는 이미 선거가 아니다. 민주주의 교과서에서 말하는 의미의 선거는 아닌 것이다. 그건 대표자 선출이라는 의미를 넘어 ‘생존의 의미’를 놓고 벌리는 처절한 전쟁이며 사생결단(死生決斷)의 혈투이다.
재밌고도 놀라운 것은 일부 입후보자들이 ‘인간 승리’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무슨 일을 하건 그건 우국충정(憂國衷情)이고 자신만이 도민의 대표자가 되어 피지배자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각 불능 또는 나르시시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부터 극복하는 것이 선거개혁의 출발점이고 모든 유권자들의 우선해야 할 일인 것만 같다.

김   찬   집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