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 동계올림픽(이탈리아의 토리노) 중계 중 관중 속 여인들이 클로우즈업될 때가 있었다.
양손을 모으고 열심히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빙상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때, 카메라도 의식 못한 채 경기장을 응시하고 있는 맑은 눈동자에는 한점 흔들림이 없다.
옆모습만 보일 때도 있지만 인생을 진지하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순간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예쁜 얼굴이 아니고 어디엔가 열중한 인생,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곧 생명체로서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열중한 여인의 코끝에 맺힌 땀방울을 보노라면 아름답다 못해 숭고한 기분에 압도당하고 만다.
인생이란 그럭저럭 살게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란 것을 세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엔가 열중한다는 것은 미의 본질적 요소라고 나는 믿고 싶어진다. 그리고 땀으로 흠뻑 젖으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운동선수의 강열함은 시청자의 가슴을 적신다. 이것이 삶의 본질 일 것만 같다. 열중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수들이 도전을 하게 될 때까지 선수들은 얼마나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을 하였을까. 좌절과 도전을 반복 되풀이 했을 것이다. 이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지난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사막 마라톤을 시청한 기억이 난다. 한국 참가자가 배낭위에 태극기를 꽂고 경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 확실한 기억은 불분명하지만 며칠동안 하는 경기다.
물기 한 점 없는 사막에서 자신의 절제와 의지만으로 달려야 하는, 혹독한 대회에 참가하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 젊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의 참가자는 ‘그냥 와야 할 것 같아서 왔다’고 한다. 언젠가는 꼭 한번 와야 할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늙기 전에 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찡함을 느꼈다. 목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무엇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한의 상황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게 한단 말인가, 며칠간의 마라톤, 그건 시합이 아닌 살아 남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화면에 비친 사막은 물 한 방울 머금지 못한 철저한 죽음의 모래바다였다.
하늘엔 태양이 작열하고 땅에선 끊임없이 열기가 치솟는다. 몸 하나 숨길 그늘이 없었다.
이것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젊음은 이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젊은 갈증이 그를 사막으로 밀어 내었을 것이다. 이 젊음은 그 자체로 값진 것이다. 스스로 채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이나, 삶이라는 자리는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가정과 직장에서의 역할은 한정되고 그래서 채워지지 않은 허탈감을 가눌 수 없어서 사막 마라톤에 참가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인생의 역경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욕망이 있었다고 상상해 보았다.
각기 온갖 형태의 삶을 끌어안고 그저 담담히 인내하며 견디어야하는 동시대인으로서 동질감으로, 동지애와 안도감에 급기야 내 마음은 파르르 전율을 느꼈다.
그의 삶 속에는 여전히 사막이 있고 신기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그 속엔 언제나 자유롭고 풍요로움이 숨쉴 것이다. 사는 일이 힘들고 외로울 때 언제고 꺼내 볼 수 있는 자신만이 신기루가 있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희망이고 인생의 등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삶 속에 촉촉한 수분으로 오래 머물 수 있었다. 그래서 TV시청, 독서 등은 꼭 필요한 정신적인 비타민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나는 금년 월드컵 축구대회 경기중계와 인간 승리기획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성숙한 마음의 뜰을 가꾸어 보려고 한다.
너무나 허황되고 욕심 있는 말이지만…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