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학교의 탄생
제1편: 학교의 탄생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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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최초 인문계 학교 7천여명의 '인재 배출'

제주타임스는 기획특집으로 도내 각급학교의 개교역사와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을 살펴보고 해당학교의 명예를 빛낸 졸업생들의 활약상을 소개함으로써 후학들에게 모교를 바로 알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동문들에게는 다시 한번 모교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게 하여 이를 계기로 동문들의 단합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학교사 게재순서는 자료입수 차례대로 게재하고 있는 점을 밝혀 둔다.


6·25동란과 때를 같이한 육군 제1훈련소가 제주도 모슬포에 설치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차 제주에 내려왔다. 14만 4천여명의 피난민들이 육군제1훈련소가 소재한 모슬포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이로 인해 피난민 학생을 수용할 임시 교육기관이 필요성이 대두 되었지만, 피난민 학생을 수용할 마땅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제주읍내에는 공립으로 5년제 제주농업중학교와 사립 오현고등학교와 제주여자고등학교가 고작이었으며, 오현고등학교와 제주여자고등학교에 피난학생을 임시 수용했으나 시설에 한계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산남과 제주서부지역을 묶어 1952년 3월 16일 인문계 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학교설립을 위해 지역인사와 주민들이 노력으로 같은 해 6월2일 대정중학교 별설로 도내 최초의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역사적인 개교를 하게 된다.
고등학교설립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많은 곤란을 겪게 되었는데 대정을 중심으로 이웃지역인 안덕, 중문, 한경, 한림까지 뜻을 같이한 여러 가정에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으고 노력봉사를 해서 석조와가 형태로 된 가교사를 먼저 짓고 나서 나중에 남향으로 앉은 본관석조건물을 지었다. 그 후 학생수가 증가함에 따라 초가로 학생들을 임시 수용할 가교사 4개동 8실이 증축되고, 훈련소와 UNKRA등의 지원으로 기와 석조건물이 본관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당시 학생들은 대정중학교가 3년제 이어서 대정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주로 제주농업중학교나 오현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을 했고 그 곳에서 4학년을 마쳤거나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학생들이 대정고등학교 개교시에 2학년으로, 대정중학교 3학년을 마친 학생들은 1학년으로 각각 편입 및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개교1년 만에 2학년으로 편입한 학생들이 제1회로 고등학교를 졸업식을 가지게 된다.
관내에 있는 육군 제1훈련소의 지원이 학교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육군 제1훈련소 훈련소장 오덕준 장군은 대정고등학교 명예교장으로 학교시설 및 부족한 교사진의 지원으로 크게 공헌을 했고, 초대 훈련소장 백인엽 장군이 학교에 목재와 건축자재를 비롯하여 교기까지 기증하였고, 이응준 장군은 1954년 6월 1일 국기 1폭과 국기계양대는 물론 사열대까지 기증해 주었다. 훈련소 본부대에서는 권준, 김종평 장군등 장교단이 중심이되어 학도호국단의 교련 교관, 조교단을 지원해 주었다. 특히 피난 내려온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당시에는 무척 초빙하기 어려웠던 유명강사들을 전 훈련소 차원에서 지원해 주었으므로 비록 초가 교사에서였지만 긍지를 가지고 면학에 힘써 졸업생들은 국내 유수의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비록 전시하였지만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대한민국 최남단에 최초로 설립된 인문계 고등학교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대정고등학교가 걸어온 길
1964년도에 이르러 대정여자중고등학교의 태동으로 대정중고등학교는 남성천하가 되어버린다. 1966년 1월 29일 대정중학교 19회 대정고등학교 13회 졸업까지가 남녀공학이 마지막이었다. 1964년 1월 11일 설립인가를 받고, 같은해 3월 16일 대정중고등학교라는 뿌리에서 파생된 대정여자중고등학교는 급한대로 옛날98육군병원자리에 석조로 된 병동을 교실삼아 개교를 하게 됨으로 남녀공학의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대정고등학교는 1966년을 정점으로 신입생이 점차 감소하게 되자 당시 부임한 김동연 교장은 중고등학교가 너무 좁은 동일구내에 있어 무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학교시설인 과학실·생활관·강당과 도서실 등 중고등학교가 같이 사용해야하는 불편을 겪게 되고 특히 하나의 운동장을 중·고가 같이 사용하게 되어 체육시간에 고등학교 형들 때문에 아우들인 중학생들이 애를 먹곤 했다.
이 무렵부터 지역유지들이 대정중고등학교 분리이설을 위한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4년 제주도교육청에서는 김황수 당시 교육감이 주도로 교육여건 개선차원인 도내 병설중고등학교의 분리 이설을 서서히 추진하여 나갔다.
대정중고등학교는 1978년 9월 1일 학교를 이설할 교지확보에 필요한 토지매수작업과 부지정리 작업을 끝내고 일차적으로 교실 1층 12개실을 완성한다는 목표로 기공식을 가지게 된다. 입지여건상 전용진입로도 없고 전기와 상수도조차 없는 산기슭에 착공되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정이 1979년 2월 19일 완성되어 중·고등학교 분리 이설목표를 달성하여 새로운 교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정고등학교는 1952년 6월 2일 개교이후 2006년도까지 52회에 걸쳐 7천여명의 지역사회를 이끌어간 동량을 배출하였다.

▲학교교지 산방(山房)의 발간
대정고등학교가 설립되고 난 후 제주서부와 산남에서도 인접지역 내에서 중등학교과정을 공부할 수 있어 제주읍내로 진출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지역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학교의 위상도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학력은 물론 예체능 분야의 기예가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교직에 있던 피난민 교사들이 정성어린 지도의 힘이 컸었다.
특히 대정중고등학교의 패기가 분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 교지 산방(山房)의 창간이었다.
대정중고등학교의 교사진은 최종학교 학력이 제주읍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제주출신은 물론 피난 나온 타교 육지부 출신들의 학력보다도 우수했다. 교지 산방(山房)을 처음 책임 편집하였던 최현식 선생은 대학의 국어과 강사로서 제주도내 교지의 효시인 ‘산방’을 창간하는데 산파역을 담당하였다. 자신이 대학에서 문학도로 생활했을 때 포부를 그대로 펴나가서 교장선생의 발간사, 훈련소장등 관계관, 대정면장 같은 지역인사와 여러 선생들의 기고와 당시 어려웠던 시대상을 반영한 학생간부의 좌담회 대담내용을 싣기도 하고, 학생문원을 통해 학생들의 문재를 키워주려는 깊은 뜻을 펴나갔다. 그러나 최현식 선생이 편집을 종료하지 못하고 군에 정훈장교로 입대하게 되자 ‘백치 아다다’의 작가이자 ‘산방’창간호 등에 기고를 많이 해온 계용묵 선생이 대정중고등학교에 임시 강사로 있으면서 교지창간의 완성을 보아 외딴섬 제주에도 학교의 교지가 있음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교지 산방은 2호부터 타블로이드 신문형태로 속간이 된다. 이 당시 대정중고등학교에 재직하였던 교사들 가운에는 문학뿐만 아니라 웅변과 토론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 많았다. 이들 교사들은 학생들의 예기를 키워 문학·웅변·음악·무용·연극 등 많은 분야에서 제주도를 대표하는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길러내었다.

강   선   종 (기획실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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