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고난의 길' …월평동으로 둥지 이전
재단법인 향교재단 연혁에 따르면, 재단은 미군정 법령 제194호(1948년 5월17일, 향교 재산관리에 관한 건)에 의거하여 도내 3향교(제주, 정의, 대정향교) 출연 재산을 기본 재산으로 하여 1948년 7월 17일 재단을 설립하고 제주시 용담동 298번지(제주향교)에 사무소를 설치하여 업무를 개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설립과 동시에 제주향교 유림이 운영하던 제주초급중학교를 인수, 제주명륜학원을 설치하여 학교를 이어나갔고, 1951년 1월 31일부로 제주지방 법원에 재단법인 제주도향교재단으로 등기했는데 1952년 학제 개편에 따라 1953년부터 제주중학교 구내에 제주상업고등학교를 설치 운영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게 운영되던 재단법인은 1963년 6월 26일부로 사립학교법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1967년 6월 27일 재단법인 제주명륜학원을 폐(廢)하고, 학교법인 제주명륜학원을 설립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운영권을 학교법인에 이관하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일한 재단(향교재단)에서 학교설립 인가를 받아 출발한 제주중학교(1945. 12. 01)와 제주상업고등학교(1953. 12. 10)는 거의 모든 교육 활동을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제주중·상고시대는 1969년 이후 중·고 분리 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같은 교장(校長)밑에 같은 교장(敎場)에서 형제학교로 의리를 다지며 계속되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학교의 모든 시설물이나 여건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학급당 인원이 85명은 보통이었다.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학생모집 공고를 보면, 한 학급당 인원은 60명이었다.
그러함에도 실제 학급 학생수는 이를 훨씬 초과하고 있다. 당시 재학했던 졸업 동문들의 진술에 의하면 어떤 경우는 100명 가까이 된 적도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당시 학적부인 학생생활기록부를 보면 학급번호가 85번까지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최대 85명 선이 아니었나 싶다.
교사(校舍) 자체도 낡고 허술하여 학생을 수용하여 가르치는 교장(敎場)으로서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제주중·상고에서는 이런 열악한 교육환경을 타개하기 위하여 꾸준하고 지속적인 교사(校舍) 신축을 해갔다.
1950년대에만 해도 세 번에 걸쳐 11개 교실 등이 증축되었는데, 1953년 1월 10일에 석조건물 3교실과 1954년 9월 13에 교실 3, 교장실 1, 직원실 1, 현관, 1956년 12월 25일에 석조 5교실 등이다.
▲학교경영자 강석범 교장
학교경영자 강석범 선생은 교육방침을 ‘명륜, 창조, 건강’에 두고 있다. 첫째, ‘명륜’에 ‘동서고금의 윤리도덕을 밝히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을 육성한다.’ 라고 명륜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교육’이란 뭐니 뭐니 해도 ‘인륜 또는 천륜을 알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그의 교육관의 첫째는 ‘사람됨’ 또는 ‘바른 인간성’으로 함축할 수 있겠다.
둘째, ‘창조’에 ‘과학적이고 생산적인 생활 태도를 함양한다.’라고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즉 교육이란 구태의연하게 살아가는 것을 지양하고 새롭고 발전적인 것을 모색하되 실용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교육관은 ‘발전 지향적 또는 미래지향적이고 실용성 추구’로 요약할 수 있겠다.
셋째, ‘건강’에 ‘심신 공히 건전한 체구의 지주가 되며, 사상 감정이 바른 민주시민을 순치(馴致)한다.’ 라고 의미를 확대하였다.
육체적 건강만이 아니라 정신적 건강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여기서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의 추구’ 라고 추리할 수 있겠다.
강석범 교장은 당시 여러 가지 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주경야독의 문을 열어놓았다.
처음부터 직장의 사환이나 공장 직공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자 야간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천중학교나 귀일중학교 등 시내 주변 학교에서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스카우트하다시피 하여 학생을 모았다. 그러나 당시 열악한 교실 형편과 자주 끊기는 조명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초창기 1회 졸업생들이 당했던 고초는 상당한 것이었다. 야간부는 한 때 1개 학년에 5학급까지 운영되기도 하였다.
학생수의 증가로 인해 재단에서는 부족한 교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주시 건입동 고매장 일대 토지 18필지 1만 9천 126평을 차례로 사들여 이곳에 중학교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73년 3월 이곳의 지형 측량 지적조사 등 기초 작업에 착수할 무렵에 제주시 변두리 지역인 고매장 일대도 몽땅 그린밸트에 묶여 학교 건물을 포함한 어떤 건축물도 지을 수 없는 건축 제한 지역으로 묶이고 말았다.
학교 법인 제주명륜학원 이설 계획에 따라 1973년 1월 1일 초대교장 강석범 교장이 제주실업전문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전임됨에 따라 용담동 본관을 쓰게 된 제주상업고등학교는 그 동안 위축되었던 각 부서활동이 활발하게 진척되었는데, 확장된 도서실을 비롯 소강당, 음악실, 상담실, 연혁실, 방송실, 탁구실, 체육실, 미술실, 양호실, 휴게실과 각 특활 부서실로 20여개 교실을 사용하게 되어 보다 나은 내일을 추구하게 되어 짧았지만 희망에 부푼 시기였다.
▲월평동 시대의 개막
제주상업고등학교는 제주실업전문학교와 동거하며 순탄하게 보였던 시기도 잠깐, 당시 설립자의 4년제 대학 승격에 대한 열망으로 부지와 건물이 팔리게 되자 여기저기 새 학교 부지를 물색하고 학교건물을 신축하는 힘든 과정 끝에 1984년 8월말 제주시 월평동 1236번지 소재인 현재 거주지로 이전하게 되었다.
부지구입과 건물신축 과정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대운동장 부지를 소유하고 있던 김한주(현, 인수당한약방원장)씨는 매입의 뜻을 밝히자 흔쾌하게 당시 시가보다 싸게 운동장 부지를 팔아주어 본교 이설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설이 결정되자 월평동 주민들이 마당 앞 나무를 기증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당시 고춘호(전, 제주대우자동차판매주식회사 대표이사)씨는 본교에 녹나무와 신나무 등 수 백 그루의 나무를 무상 기증해 본교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동창회에서는 경희대학교 교문을 참고하여 되도록 넓게 크게 보일 수 있도록 고심하여 본교 교문을 건립했다.
1984년 8월 30일 현 위치로 교사를 신축하여 이설 하자 본교가 속해 있던 학원이 부도로 인해 학교 경영에 커다란 타력을 입게 된다. 학교 재정이 극도로 어려워져 학교 시설환경은 기본적인 교사 신축에 머물렀고 그 외의 학교 시설은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교실 부족은 물론 특별실, 운동장 시설, 주변 환경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게 없을 정도로 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
강 선 종 (기획실장/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