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의 추구
편리의 추구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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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제주시 삼도1동에는 최근에 “클린하우스”라는 시설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쓰레기를 분리해서 배출하는 시설이다. 도로변의 공터에 이 시설이 설치된 후 길거리가 매우 깨끗해졌다.
이전에는, 아침이면 집앞에 배출된 쓰레기 봉투가 널려지는데, 고양이가 음식물 냄새를 맡고 마구 뜯어 놓는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이것들이 흩날리며 거리를 지저분하게 뒤덮는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풍경은 사라졌다.
그리고 매일 집앞을 지나던 쓰레기 수거 차량도이따금씩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시설 비용이 많이 들지만, 몇 년만 지나면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라는 당국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시설의 부대 효과는 경제적인 면이 아닌 데서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토록 쓰레기 분리 배출을 강조해도 별 반응이 없던 주민들이 이제는 자진해서 분리 배출한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을 유도해낸 것이 클린하우스의 커다란 공로라고 생각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금전으로 따지거나 저울로 달아볼 수 없는 소중한 보화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성숙된 시민 의식이 자연스레 터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고 아름답게 해 주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뼈저리게 아파해야 할 일이 여기에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는 도로변의 공터에 이를 설치하려다가 주변에 사는 주민이 “결사적으로”반대해서 포기한 일도 있다.
집앞에 혐오 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는 주장이다.
마치 인생무대의 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우리의 작은 주소가 이웃과 더불어 끈끈하게 이어졌음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의 아픔이다.
우리의 아픔은 여기서만 멈추지 않는다.
집앞에서 100m가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클린하우스까지 걸어가기가 “불편해서” 도로의 후미진 곳에 아무렇게나 쓰레기 봉투를 쌓아 놓는다.
우리는 어찌하여 이토록 약간의 수고조차 배척하는 이기적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는가?
 물론 인간은 편리하게 살아가려는 근본적 욕구를 갖고 있다.
거의 모든 기계 문명은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기계의 주인임을 포기할 때, 기계는 우리를 노예화하고 말 것 이다.
인간의 노예는 한 주인만 섬기면 되지만, 기계의 노예는 수많은 주인을 섬기기에 기진해버린 끔찍한 모습으로 전락할 것이다.
편리의 추구에만 도취되었을 때, 그 편리 또한 우리를 거미줄에 걸려드는 곤충처럼 얽매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편리의 추구에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가? 건강한 다리는 2층을 오르지 못하여 승강기를 탄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시장에 걸어가지 못하여 승용차를 탄다.
그릇을 씻지못하여 1회용품을 마구 사용한다.
우리의 부엌에서는 합성세제가 홍수로 쏟아지며 하수구를 통해 강으로, 바다로 흘려간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를 얽매이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아예 무감각해진 채로 우리는 편리하게 살아간다.
우리의 유용하고 가치 있는 수고를 통해 인생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노동은 최선의 것이기도하고 최악의 것이기도 하다. 자유스런 노동이라면 최선의 것이며, 노예적인,  노동이라면 최악의것이다”
“(알랑) 우리는 기계나 태만한 편리라는 음흉한 주인으로부터 해방되어 오히려 그들을 조종하는 자유인임을 선언한다” 100m가 조금 넘는 거리의 클린하우스에 잘 분리된 쓰레기를 들고 가는 노동은 우리의 자유 의지에서 이루어지는 최선의 노동이다. 이 노동은 나태와 중오를 포함한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원동력이 될 것 이다.

김   영   환 ( 전 오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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