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승마(御乘馬), 군마(軍馬), 국내목장의 종마(種馬) 등을 공급
어승마(御乘馬), 군마(軍馬), 국내목장의 종마(種馬) 등을 공급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계의 8준마가 연례진상마 8필( 太祖 李成桂 八駿馬, 年例進上馬 8匹)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으로서 풍전등화와 같은 고려왕실을 지키기 위해 또는 어쩔 수 없이 꺼져가는 고려왕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압록강에서 회군할 때와 조선을 개국 후 외적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에 타고 다니던 여덟 필의 말을 八駿馬라 이른다.
 첫째는 횡운골(橫雲骨)이라 하여 여진에서 태어났고 나하추를 패주시키고 홍건적을 토벌할 때에 이성계를 도운 말이다. 둘째는 유린청(遊麟靑)인데 함흥에서 태어나고 올라(兀刺)를 빼앗고 해주에서 싸우고 운봉의 전투에서 이기도록 한 말이다. 셋째는 추풍오(追風烏)라 하는데 여진산이고 넷째는 발전자(發電子)라 하는데 안변에서 났고 장단에서 사냥할 때에 타던 말이다.
 다섯째가 용등자(龍騰紫)라 하는데 단천에서 났고 해주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에 타던 말이다. 여섯째가 응상백(凝想白)이라 하는데 유일하게 제주산이고 위화도 회군시에 타던 말이다.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떨치는 것이 어찌 사람에게만 있으랴. 하찮은 짐승도 시운에 따라 이르렀다. 싸움터에 나가고 사냥터를 달릴 때면 나는듯하고 신묘하여 모두가 힘을 다하여 요사한 기운을 쓸어 없앴다. 이 凝想白의 공보다 누가 더 크랴! 한 번 채찍질하여 군사를 돌리니 큰 기업이 크게 열렸다.”
 일곱째는 사자황(獅子黃)이라 하는데 강화의 매도에서 났고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에 타던 말이다. 여덟째는 현표(玄豹)라 하는데 함흥에서 났고 토아동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에 타던 말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만들어서 이 여덟 마리의 말을 극진히 칭찬하였고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八駿圖를 그리게 하고 집현전 학사 成三問으로 하여금 그 찬을 짓게 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으나 각종 병화로 말미암아 그림은 볼 수 없고 용비어천가에서 활동상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화가들이 팔준도라는 이름의 그림을 자주 그리게 되었다.
※八駿馬는 역사상 유명한 여덟 필의 駿馬 곧 화류, 유이, 적기(赤驥), 백토(白兎, 白義), 유륜(踰輪), 거황(渠黃, 驍渠), 도려(盜驪), 산자(山子)
주나라 주목왕이 낙원인 곤륜산으로 여행갈 때 타고 갈 수레를 끌었던 여덟 필의  천리마를 말한다.
※ 팔마비(八馬碑) - 전남 순천에 있는 여덟 필의 말의 비석으로 고려시대 부사 최석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기리기 위한 비석인데 이것으로 순천은 마필의 고장 혹은 청백리의 고장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도움자료;한국마문화 발달사)

 제주마필은 탐라국 초기부터 백제와 신라에 예물로서 조공하였으며 일본과 당나라와 교역하였고, 고려 문종 때에는 탐라국에서 예물로 진상된 제주마를 문·무관에게  하사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매년 수십 필에서 수백 필까지 공마봉진을 하였으며 지방의 일반관리수행 마필 수는 직명에 따라 2~5필과 위종(衛從)은 3~9명이고, 오늘날의 관용차와 같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원·명나라와는 공마 또는 교역마로 제주목마장에서 생산된 제주마필이 공급되어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 중앙정부에서 활용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보면 제주도(濟州島)는 국내최대의 목마장으로서 어승마(御乘馬), 군마(軍馬; 戰馬), 종마(種馬), 역마(驛馬)와 파발마(擺撥馬),태마(?馬), 만마(輓馬), 복마(卜馬) 등에 활용될 말 공급지로 중요시되었다.

○ 어승마(御乘馬)
 성종 24년 고태필(고득종 아들)이 제주의 일에 관해 아뢰기를  본주(제주도)는 천사방성(天駟房星)이 비치는 땅이라 원나라 세조가 목장(牧場)을 만들기를 명하여 달단마(??馬)를 들여보내어 놓았는데 지금에 와서 일컫기를 용매(龍媒)의 소생(所生)이라고 하니 이 까닭으로써 어승마(御乘馬)를 생산하여 매년 별도로 삼명일의 공헌마로 쇄출(刷出)한다는 내용이 있다.
 어승마 선발시기에 있어 중종23년 5월 제주목마장에는 어승마가2~3필만 있기 때문에 점마별감을 미리 차출하여 첫여름에 들여보내게 하라고 전교하였고 연산군 6년 전교하기를 어승마는 몸집이 큰 것은 필요 없다. 아무리 몸집이 작더라도 길이 잘 들면 탈 수가 있다. 라고 하였다.
제주에서 어승마로 바치는 말은 평년에 연례 진상마 8필과 삼명일(誕日·正朝·冬至) 진상마 60필이고 삼년마다 식년에는 어승별마 20필, 차비 진상마 80필이 추가되어 보내졌다. 그리고 비정기적으로 체임마 10필(목사, 판관 각 3필, 대정정의현감 각 2필)과 봉진마(산마장 감목관 2년에 2필)가 보내졌는데 그 중 가장 중시된 것은 연례진상마 8필과 체임봉진마로 연례진상마(年例進上馬)는 태조 이성계가 탄 8준마(駿馬)에 비교해서 8필을 명마(名馬)라 하였으며 홍늑(紅肋:붉은색의 굴레)하여 봉진했다고 한다.
 숙종28년(1702)탐라순력도의 공마봉진 433필중 20필이 어승마 등이 기록되어 있으나, 정조21년 8월 2일에 탐라의 말로서 세공(歲貢)으로 진상된 것 가운데 어승(御乘)이 된 것은 예로부터 드물었다. 지금 제주목사 유사모(柳師模)가 교체되어 온 뒤로 진상한 말이 곧바로 어승(御乘)이 되었으니, 이것은 목장을 설치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경려하고 권장하는 도리로 볼 때 논상(論賞)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여 목사 柳師模에게 “내구마(內廐馬) 1필을 특별히 하사하라?? 라고 하교하였다.
 어승마를 생산한 목장은 3소장과 6소장의 청마장(산장)과 어승생악이 있는 4소장과 산마장내의 갑마장(표선면 가시리공동목장)이나 10소장과 별목장에서 생산한 말을 선발한 체임마, 산마장에서 생산한 봉진마를 바친 것이다. 이 말들은 습마방에서 기르면서 습마 2명으로 하여금 조련케 하여 임기가 끝나면 내사복시에 바쳐 엄격한 심사를 거쳐 합격하면 내구(內廐)에서 사양하고 어승마로 활용되었으나 불합격하면 목사·현감 등은 경고, 중경고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봉진마인 경우도 불합격되면 산마장 감목관도 처벌되거나 파직되었다고 한다.
 임금은 기린(麒麟)과 용(龍)에 버금가는 존재로 인식하였기에 임금이 타는 말을 키우는 마사(馬舍)의 명칭이 기린(麒麟)과 용(龍)을 뜻하는 글자로 경복궁내에는 기구(麒廐), 창덕궁 금호문 밖에는 용구(龍廐)라고 하였다. 연산군12년에는 용구(龍廐)에 어승마를 바치는 자에게 1등은 망아지 8필, 2등은6필, 3등은 5필을 주라고 전교하였다.
이와 같이 제주공마에 있어서 연례 진상마, 삼명마, 어승마, 체임마 중 조정(朝廷)에서 어승마로 선발된 제주마는 적은 수(匹)였다고 생각된다.

○ 군마(軍馬;戰馬)
제주도목마장에서 생산된 말은 군마(軍馬)로서 중요한 공급지로, 세종5년염군정(軍政)은 말보다 급한 것이 없다?? 라고 하였으며, 선조 27년(1594)4월 전마(戰馬)를 바친 제주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직을 제수케 하였고, 7월에는 제주의 진상마(進上馬) 100여필 중 전마(戰馬)로 쓰기에 적합한 20~30필을 본조에 이송하여 형편에 따라 길러서 전쟁에 나가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혹은 시재(試才)에 입격한 금군(禁軍)에게 상으로 주는 것이 마땅하겠으므로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응당 받아야 할 사람에게 먼저 나눠준 뒤에 남은 것이 있으면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선조28년 9월에는 제주의 별마를 무사(武士)에게 사급(賜給)하기위해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선조33년(1600)과 광해군10년(1618), 인조5년(1627)에 개인목장에서 말을 사육했던 김만일은 전마(戰馬) 1,500여필을 국가에 헌마(獻馬)하였다.
 정조 22년 제주공마는 어승마 20필, 삼명일 진상마 60필, 차비진상마 80필, 세공마 200필, 흉노마 20필, 합 380필 가운데 선중(船中)에서 죽은 말이 3필, 중도에서 5필, 시흥에서 달아난 말 5필을 제외하고 화성친군위(華城親軍衛) 8필, 전곡목장에 100필을 배정하고 나머지 259필은 사복시에 배정하였다고 한다.
헌종6년 우의정 조인명이 군마 충당에 대해 아뢴 것을 보면 제주의 공마는 어느 해에도 그 수가 많지 않으나, 식년(式年)에는 600필에 가까운데, 군마(軍馬)로 나누어 주는 것은 3분의 1도 못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모든 사여(賜與)·잡탈의 수는 한결같이 여느 해의 규정에 따라 시행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군마로 배정해주면 군비(軍備)에 있어서 얻는 것이 매우 클 것입니다. 고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종 9년(1872) 제주세공마 200필중에서 3군부(三軍部)에 10필, 수원부(水原府)에30필, 강화부(江華府)46필, 훈련도감(訓練都監)에 12필, 금위영(禁衛營)에 12필, 어영청(御營廳)12필을 분배하고, 나머지 73필은 사복시에 전달되었다.

○ 역마(驛馬)와 파발마(擺撥馬)
 임진왜란 이후 봉수대가 파괴되어 교통과 통신용으로 제주마들이 공급되어 활용되었다. 공무로 출장가고 오는 관원은 상서원(尙瑞院)에서 발급하는 마패(馬牌)를 증표로 삼아 역마(驛馬:刷馬)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비변사나 각도의 수령(목사)이 발급한 문서(草料)를 지참하여 각관(各官) 각역(各驛)에서 역마를 이용할 수 있었다.

((42) 제주마의 활용(2)에서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