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말의 배상, 관원의 수탈 등 계속돼 목자들은 가난한 생활, 심지어 파산하기도
제주도목마장의 운영과 도민 및 목자생활(1)
고려시대 충렬왕 2년(1276)때 수산평(동아막)을 중심으로 탐라목마장 개설 과 그 주위에 4개의 목마장 및 고산평(서아막)을 중심으로 한 4개의 목마장은 몽골의 목장관리 체계로 운영되었다.「以耽羅爲房星分野 置牧使置萬戶 以主畜牧」 馬畜之所 猶哥之屈産 非諸州之所可擬也 牧場四所 旌義大靜同)
조선시대 초기에는 탐라목마장의 체계를 답습하였으나 세종11년부터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발 150~250m에 도(島)전역을 타원형으로 하잣성을 쌓아 10구간으로 나누어 10所場(國營牧馬場)을 개설하였다(山腰以下周回 設十牧場). 국영목마장의 운영은 국가가 도민에게 배정한 목장전(牧場田)과 생산한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것 그리고 강제노역 등으로 충당하였다
세종11년(1429) 제주도의 소의 방목과 관리를 보면 제주는 토성(土性)이 메마르므로 농부들이 밭 가운데 바령팟(農夫於田內必造八場養牛取糞)을 만들어 낯에는 사람의 집근처에서 소를 방목하고 밤에는 이곳에 몰아넣어 소똥을 받아 종자를 뿌린 뒤에는 소를 모아 밭을 밟게 하여야 싹이 살 수 있습니다.
인조때 이건(李健:宣祖의 손자)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 크고 작은 소와 말(牛馬)은 여름·겨울을 막론하고 들에 방목했기 때문에 인가(人家)에는 소와 말의 똥 (牛·馬糞)이 없었고 도민(島民)들은 본시부터 牛·馬糞을 싸두었다가 밭에 거름하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素不解載糞 糞田之理). 그래서 牛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富者)는 목동(牧童)을 정하여 牛馬를 몰고 나가 아무데서나 먹이고 일몰이 되면 한 밭으로 몰고 들어와서 밤을 보내면 똥을 싸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 해가 높이 올라온 후에야 다시 방목한다. 매일 이와 같이하여 똥(糞)이 밭에 쌓일 정도이면 다른 밭으로 옮겨가서 똥을 받았다. 이러한 일은 봄부터 가을에 이르도록 행하여진다. 이렇게 하여 다음해에 보리를 경작(耕作)하면 곡식이 잘 되므로 이를 분전지도(糞田之道: 바령팟)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는 집도 많지는 못하다
조선시대 목마장의 규모와 운영
조선시대 제주도의 인구는 세종32년(1450)제주목 8,424명, 정의현 2,073명, 대정현 2,500명 합 12,997명, 전결(田結)은 9,613결, 답(畓)은 116결이었으나, 숙종29년(1703) 인구는 43,515명, 전결은 3,640결, 철종1년(1850) 한성부에 올린 제주의 대정·정의의 두 고을의 민호수가 1만 1천 1백24호(戶)이었고, 남자가 3만7천7백 71구(口), 여자가 4만2천1백39구(口)로 인구는 증가하였으나, 전결은 점점 감소(減少)되어 목장용지를 경작지로 활용되는 예가 많아 져 갔다.
선조34년(1601)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쓴 남사록(南?錄) 제주목양에 있어 제주목은 국마(國馬)33둔(屯) 웅마(雄馬)990여필, 자마(雌馬)2,360필, 목자(牧子)315명(名), 정의현은 국마(國馬)12둔(屯) 웅마(雄馬)300여필, 자마(雌馬)820필, 목자(牧子)84명(名), 대정현은 국마(國馬)5둔(屯) 웅마(雄馬)86필, 자마(雌馬)194필, 목자(牧子)24명(名)으로 합계 말 4,750여필과 목자가423명이었다.
효종4년(1651)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 제주목의 목양에는 마장(馬場) 장올악(長兀岳:물장오리)에서 감은덕천(感恩德川:고산리 자구내 상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목장이 있었는데 7소(所)38자(字)이며 말은 6,450필(匹)이며, 매자(每字)에 군두 각1명, 군부 각 2명 목자 각4명인데 절간(寺)의 노복으로써 충당하고 매소(每所)에 마감(馬監)명씩이 있었으며 목자는 옛날은 보(保)가 없었는데 이경익의 건의에 의하여 보2명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영문(營門)에는 습마(習馬) 6명이 있어 열마(閱馬)할 때 진상할 말을 가리고 또 기르고 조련하고 병 치료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정의현은 3장 17자 말은 2,383필, 대정현은 1장 3자 말은 1,552필이며 합계 말이 10,185필이다.
제주도목마장은 방목장(마장), 건초채취장(마초장;촐케), 목자에게 2결씩 지급되는 목자위전(경작지), 그리고 목자에게 채소를 공급하기 위하여 설치한 채전(채소 등을 경작하는 우영팟)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은 방목장에서 목양하기 마련이겠지만 목자의 인건비는 목자위전과 채전으로써, 사료는 건초와 도민에게 부과하는 납초로써, 그 밖의 경비와 민간마 구입비는 목장마와 가죽 등을 판 수입금 및 도민의 바치는 현물과 세금으로 부담하였고, 매년 정기적으로 말을 점검할 때와 목장내의 토목 및 건축공사에 목자와 도민의 강제 동원하였다.
제주도목마장의 운영은 초기에 안정적이었으나 임진왜란이후 점차 어려워져 국가는 목장전을 도민에게 경작하게 하고 그 세금을 징수하여 목장경영에 충당하였다.
목장전의 규모는 조선시대 초기에 제주도 모든 지역의 산야에 설치되었지만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 세종 11년 한라산 중턱 일대에 10개의 목장(10소장)을 설치하고, 효종 9년(1658)에 다시 한라산 중턱 이상에 산마장을 설치하였다. 제주도목마장 10소장(목장)은 설치 당시 165리 였으나 정조 17년 무렵에는 597리로 확대되었다. 산마장 3곳을 합쳐서 180리 었고, 사목장(개인목장)도 한라산의 절반정도를 차치하고 있었다.
영양가가 좋은 건초채취장의 건초와 곡초를 먹이는 것은 양마생산과 직결되어 있어 철저한 관리를 기해왔는데, 10소장 전체에는 약 450개소에 달하는 건초채취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말 사료에 있어서 목초로는 자골, 모애, 갈근, 잔디, 어욱, 제주조릿대 등이며 곡초는 피(稗)와 콩과 목초를 건조시켜 촐(꼴)을 확보하고 썩지 않게 보관하여 공급하였다.
제주도 국마목마장은 본토의 다른 목장과는 다르게 기후가 따뜻하여 봄·여름·가을철에는 방목하여 목양(牧養)하고 겨울철 3개월만 건초와 곡초를 먹였다.
목자위전은 목자의 생활비로 2결씩 지급한 목장 내의 토지로서 세금을 면했으며 매매가 금지되었다. 목자위전을 면세한 것은 목자의 부담을 덜어, 마(馬)생산에만 생업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관원들에 의해 유세지로 탈바꿈하였고, 또한 목자들은 사계절 내내 말을 살피느라 목자위전을 제대로 경작할 겨를이 없어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현종 4년에는 2,777결을 목자 1,386명에게 지급되었는데, 현종 30년에 그나마 목자위전도 없어 제때에 지급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한편 목자는 호(戶)에 부과되는 요역 부담을 면제해 주는 복호(復戶)를 받았다. 그러나 정역으로 부과된 말·소 생산 및 여러 가지 잡역이 복호보다 고역이었던 까닭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39-2)제주도목마장의 운영과 도민 및 목자생활]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제주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