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돌 빼서 웃돌 얹는 꼴
새해 벽두부터 양극화(兩極化) 담론이 거세다. 계속돼온 사회적 의제였지만 담론의 확전(擴戰)은 대통령이 촉발했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을 증세(增稅)정책으로 마련하겠다는 뜻의 발언을 하면서다.
지난주 TV 신년연설에서다. 25일의 기자회견에서는 “당장 세금 올리는 것 아니”라고 한 발 물러서는 듯 했지만 논란의 불씨는 여전하다.
심각한 빈부격차로 야기되는 양극화 현상 해소를 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재원을 세금 더 걷어 충당하자는 내용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얼핏 듣기에는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더 거두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이것이 비록 좌파적 발상이거나 포퓰리즘 정책이라 해도 어려운 사람들 입장에서는 꿀단지처럼 달콤한 이야기다.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내놔서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꿀단지 속에는 달콤한 유혹의 독(毒)사탕이 들어있다. 세금은 부자들에게만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고 유리처럼 투명한 서민들의 지갑에서도 짜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세금에 의한 양국화 해소 방안은 아랫돌 빼내 웃돌 얹는 눈가림 공사나 다름없다.
그래서 조세위주의 분배정책은 소득구조가 단순하여 훤하게 세원이 노출되는 근로계층의 조세부담만 가중시킬 뿐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增稅보다 일자리 창출이 먼저
사실 지금의 빈부 격차는 심각한 상황이다. “못살겠다”고 한 숨 쉬는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백성이 세금을 아니 내서가 아니다.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걷어내지 못해서도 아니다.
일자리가 없어서다. 살맛이 안 나도록 생활이 피폐해지고 쪼들리기 때문이다. 편가르기와 코드정치로 일관된 파행적 국정운영이 원인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나온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투자를 유발시키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소득을 높여주면 되는 것이다. 민간부문의 취업 영역을 확대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국가경영능력이며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세금을 쥐어 짜내 그것으로 공적 영역을 확장시키려는 발상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렇지 않아도 (재정경제부의 자료대로라면) 올해 4인 가구 기준의 연간 세금은 1424만원, 준조세 성격의 국민부담금이 1860만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디에서 또 백성의 피와 땀을 쥐어짜겠다는 것인가.
그런데도 대통령 한 말씀에 엊그제까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의장으로 국가안보에 막중한 책임을 졌던 사람이 “평화체제를 구축해 군 병력을 현 수준의 절반으로 감축한 국방비를 양극화 해소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어린이 병정놀이 수준의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니 더는 뭐라 할 것인가. 황당할 뿐이다.
'믿을 수 있는 정부'가 열쇠
양극화 해소는 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입으로 말하는 정치가 아니고 가슴으로 하는 정치, 분열이 아니고 통합의 리더십이 바탕이다.
그런 연후에 경제활성화, 투자촉진, 고용과 취업기회확대 등의 정책을 펴는 일이다.
그래서 빈곤계층에 소득기회를 넓혀 백성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마다 7%의 경제성장률과 재임 중 250만개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었다. “노무현 시대는 국민의 70%가 중산층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호언했었다.
그러나 경제 성장률은 임기 1년차 3.1%, 2년차 4.6%, 3년차였던 2005년은 턱걸이 4.0%였다. 중산층은 무너져 내렸고 빈곤층만 더욱 확대 재생산 됐다.
이것이 말로써 말많은 참여정부의 ‘3학년 성적표’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정치를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방위를 튼튼하게 하며 백성이 믿고 따르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의 신뢰라 했다.
‘경제와 안보와 신뢰’. 그렇다. 2천 몇 백년 전 공자의 정치논리는 지금의 정치상황에서도 유효한 진리나 다름없다.
“정부의 신뢰성회복이 양극화 해소 방안의 출발일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김 덕 남 (주필)